누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을 오월정신이라 하는가

 

누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을 오월정신이라 하는가

 

금년(2022) 5.18기념식’에서, 윤석열 새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월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 그 자체입니다, 오월이 품은 정의와 진실의 힘이 이 시대를 넘어 영구히 빛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전 국민이 곧 광주시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군중항거를 키워드로 오월정신이라 정의하면서,그것을 통해 국민통합을 호소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조선일보의 한 중진 칼럼니스트도 덩달아(?), 새정부의 내각, 여당 국회의원 전원이 윤 대통령과 함께 5.18기념식에서 소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것을 두고, 5.18이 우리 사회 민주화의 동력이 됐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고, 5.18진상’은 나올건 다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아마도 윤대통령을 지지하고 동시에 조선일보를 애독하는 대부분의 애국시민들은 이런 선거공학적, 정치공학적 또는 언론(신문)공학적으로 보이는, 대통령이나 언론인들의 ‘포퓰리즘’적 사상에 대해서만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날 진중권교수는, “전두환 비석을 짓밟고 5.18묘지로 드나드는 모습은 옳지않다”고 했는데, 그런 모습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그 정신이 ‘오월의 정신’이라 한다면, 또한 윤 대통령이 말하는 ‘오월이 품은 정의와 진실’이 이러한 것이라면 온 국민이 공감하기에는 더욱 아닐 것이다.

 

5.18기념식’ 바로 다음날인 519일 오전, 서울 현충원 경찰충혼탑 앞에서는, 당시 ‘경찰 4명을 동시에 숨지게 한 ‘배씨’(5.18유공자) 42년만에 그 경찰 유가족들에게 나와, 고개숙여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하였고, 유가족들은 이를 받아드려 “용서한다”면서도, “우리 아버님들의 죽음도 5월 영령들과 동일한 희생이고 아픔이었다고 당신이 말해 달라”고 하였다.

배씨는 1980 5 20일 밤 전남도청(당시), 시위대의 도청진입을 막으려고 대형을 갖추고 선 경찰 수십명을 향해, 몰고간 버스로 무자비하게 돌진하였고, 미쳐 버스를 피하지 못한 4명의 경찰은 그 버스에 깔려 죽었고 5명은 부상당했다. 배씨는 그 즉시 도망갔고, 2년여 복역후 민간정부의 특별사면으로 나와 ‘5.18유공자’로 인정받아 각종 혜택을 받고 살아왔다.

그런가하면 순직한 4명의 경찰 유가족들은, 줄곧 가해자로 분류돼 “정부도 5월 단체들도 죽은 듯 있으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은 삶”으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숨죽이고 살아야했다. 반면 오히려 시위운동에 참여해 공권력 즉 경찰과 계엄군에 가해했던 그들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되어, 5.18유공자’로 분류되 보상 - 전체는 7차례 총 2510억원 - 이 이루어졌으며 각종 혜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의 실상이 그러하기에, (이제도 한없이 때늦은바 있지만) 경찰유족들에게도 현장의 진상이 규명되어 명예회복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겠다. (동일자 조선일보 보도)

물론이다, 어디 그 뿐이랴, 5 18 09.00시 이후 감당하기 어려워진 경찰을 대신하여 계엄군이 진압전선을 전담함으로서 한때 강경진압 대 강경대응으로 상호피해가 발생하였는데, 사태 이후 당시 민간피해자에 대한 조사와 보상은 위에서 본바와 같이 있어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강경시위자들의 불법가해에 의한 계엄군인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국가공권력인 계엄군의 명예를 땅바닥에 떨어트리고 필설로 다하지 못할 그동안의, 특히 민간정권에 의한, 억제와 고의적(?) 견제 그리고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당하여 학대(?)를 받아왔던 피해(희생)군인들에 대한 진상조사와 보상도 이루어져야 함이 마땅하였거늘 오늘까지도 정권들은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번 윤 대통령의 기념사에도 ‘5.18민주화운동유공자와 유가족’과 그 이웃에게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했을 뿐 당시 공권력이요 계엄군이었던 군경과 특히 희생 유가족에게는 한마디 위로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대단히 유감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제부터 윤석렬 정부에서는 이 모든 ‘변란사태들’ - 4.3제주도반란사태’ 등도 포함 - 의 진상과 현실을 재인식하고, 그가 소망하는국민통합을 위해서라도, 갈등해소와 화해협력을 전재로 하되, 더불어 특히 그동안 명예회복과 보상차원의 예우에 소원했던 계엄군경 희생자들을, 사태 야기자들이 받은 대우와 보상 이상으로 긴급조치하여야할 것이다.

동시에 이제 윤 정부의 국민통합 호소를 계기로, 우리 국민들(광주시민과 전라도민포함)은 ‘5.18광주사태’의 진정한 진상규명으로, 그 과정에서 야기된 진압군과 현장 시위대간의 무력충돌에서 발생했던 모든 비인권적 가해행위에 대해, 그 현장의 당사자와 책임자 또는 책임단체(기관)로부터 진실을 듣고, 그리고 당사자 상호가 만나 서로 사죄받고 용서하여 화해함으로서, 그리하여 ‘오월의 정신’을 바르게 정의(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부간에)함으로서 우리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이 열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특히 현재 활동중인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 경찰피해 뿐 아니라 계엄군 피해도 철저 규명조사 - 을 지지성원하면서, 그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는 몇몇 상황에 대해 현장기록(조갑제, 지만원 저서 등)을 발췌요약해 드리니 꼭 참고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광주사태 발발(원인) 현장

이미 계엄령이 발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5.18) 09.00시경, 조선대학교 교문앞에서는 250여명의 대학생들이, 이미 주둔중인 계엄군에게 시비를 걸고, 계획적으로 가방속/근방의 돌멩이로 투석하여 계엄군 초병들을 피투성이로 부상하게 함으로서 계엄군을 흥분시키고 자극하였다.

그 학생집단은, <휴교시 행동지침>에 따라, 그대로 광주시내로 나가, 미리 와 있던 또 다른 수백명과 합세하여, 계엄령하 모든 시위행위가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군대 파출소와 공공건물을 유목적적으로 방화/파괴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고,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을 공격하며 인질로 잡고, 진압자산을 방화 파괴하는 등 시나리오대로(?) 사회 무질서와 혼란을 야기하여, 전 광주시민들을 봉기 분위기로 자극해 나갔다.

이 예상외 강경소요사태로 광주경찰은 속수무책으로 피신하면서 계엄군 출동을 요청하였고, 이에 지역계엄분소에 배속된 7공수특전 2개대대(겨우 약 600여명) - 전남대학에 주둔 중 , (31사단장, 그 지역출신)에 의해, 경무장으로 긴급하게 시내로 출동, 격렬한 시위대를 상대로 상대적으로 강경 초동진압작전을 실시하였다. 그와 동시각에 시위대측에서 광주시민들의 지역감정과 인간본능적 흥분을 크게 부추기기 위해, 사전에 계획적으로 제조된 ‘악랄한 유언비어’를 소나기처럼 광주시내 골목마다 쏟아내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 찌르듯이 닥치는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고,

계속 반복하여 온 시내를 돌며 선전선동하였다.

그러자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각에는 물론 그날(18)은 경찰이나 계엄군에 의해서 한 사람도 사망자가 없었고 그런 잔인행위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기에 이는 완전한 허위 날조의 선전선동 구호였다.

. 만남과 화해 제의 ;

1. 전북대 교문에서 투석한 학생들과 얻어마저 피흘린 군인과 만나 화 해 하라,

2. 완전하게 허위날조된 유언비어를 조작한 사람과 이를 전파한 사람 들은 그 이유와 경위를 고백하고 사죄하라.

3. 엄연한 계엄령하에 <휴교시 행동지침>은 누가 왜 계획한 것인지, 이에 따라 시위대를 지휘한 자는 고백하고 사죄하라, 규명위원회는 이를 진실규명하고 공지하라.

 

. 예상외 시위대의 인권말살 (행위)현장

5 1909.30시 경부터 시위자들은 “위대한 민주의 횃불 김대중 선생을 구하자,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전남국(全南國)을 만들자,현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 위정자는 떠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주도자는, 어제와 오늘 현재까지도 희생자가 없었음에도

“전남대 정문앞에서 특전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차별 살상하고 있다”는 허위 날조된 내용을 전국대학가에 살포하여 대자보가 되게하고, 이날은 ‘민주투쟁회보’ 삐라를 전 광주시내에 살포하였다.

동시에 어제에 이어서 오늘은 거의 완전한 거짓과 더욱 선동적인 내용으로 전옥주를 비롯한 몇명의 여인들이 확성기 차량으로 강박과 선정적인 목소리로 시민들을 선동하였다. 그 악랄한 내용을 보면,

“경상도 군인 전라도에 와서 남녀노소불구 밟아죽이고 있다”,

“이화여대생 3명의 팬티와 부라자까지 찢어내고 구둣발로 엉덩이를 찬후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수창초등학교앞 전봇대에 산사람을 거꾸로 매달았다”,

“어제 5 18일에 40명의 시위학생이 죽어 금남로가 피바다가 되었다”,

“공수대원들이 ‘젊은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고 광부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개 몇 마리 잡았느냐’고 농담을 한다”,

“계엄군이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이 발가벗긴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의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학생 시민은 궐기하라 경상도 차를 보면 불태워라”.......... 등등.

 

11.00시경, 충장로 한 거점(검문소)에 배치된 계엄군에게 근접투석, 화염병공격으로 장병 6명이 골절상 등 중경상으로 죽음직전에 인접부대가 이들을 구출하였다.

15.40분경, 금남로에서 인근공사장의 경유를 바닥에 붓고 방화하고, 그 속에 경남과 부산 번호판의 일반차량을 밀어넣고 불태워(경상도 운전수는 필사적으로 탈출) 바리케이트로 하고 계엄군 공격. 이후 19.45분경에도 청과물 시장에서 경남번호판의 화물자를 불붙여 계엄군에 돌진시켰다

이때는 이미 수천명의 과격시위대가 숫적으로 절대 열세(몇십명 단위)인 계엄군을 각각 근접 포위하고 그 전위 요원들은 도끼, 각목, 솨파이프와 흉기를 휘두르며 계엄군 개개인의 생명까지도 위협 코앞에서 도끼로 철모를 치며,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버려?” 하는 인권말살 상황에서 1명을 빈사상태로, 12명에게 중경상을 입혔으며, 기독교방송국에 난입하여 경계중이던 계엄군을 폭행하고 소총을 탈취하였다.

17.00시경, 실종 전우 구조 시위대의 허위 제보로 - 를 위해 장갑차를 선두로 31사단 구조대가 광주고부근에 이르자, 기다리던 시위대가 정지시키고, 장갑차 덮개를 열어 10여명이 탑승중인 속으로 불붙은 집단을 넣으려고 했다, 순간 속에서 지휘 장교가 밖으로 나오면서 소총위협사격(대퇴부)으로 집단 화장몰살을 면하였다. - 이는 5.18사태후 최초 총성이고 민간인 총기부상 최초 사례 -

 

. 만남과 화해제의 ;

 

1. 특히 장갑차에 불타는 벼집단을 투척하려했던 사람과 이를 자위발포 한 당사자들이 만나 사죄, 용서 그리고 화해하라,

2. 또한 경상도 자동차를 불태워 죽음으로 몰았던 자와 그 위기에서 탈 출한 경상도 운전기사가 만나,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하라.

3. ‘규명위원회(약칭)’는 “임산부 배를 찔러 태아를 들어내고.... .” 등의 악랄하게 날조된 유언비어를 만들고 삐라를 뿌리고, 특히 계속 가두 방송하여 봉기를 선동한 당사자들의 고백(?)과 사죄를 듣고 그 진실 을 규명하여 공개하라.

. 5 20, 시위대의 잔인한 돌진공격으로 군경늑사, 현장

이날 16.00시경부터는 계엄군 거점(200여명)마다 500~1000명으로 조직된 시위대가 거의 같은 전술전법 쇠파이프, 화염병, 불붙은 휘발유드럼통, 대형차량 수십대 단위로, 미친 버스를 지그재그로 돌진공격 으로 공격을 가하여 계엄군에 많은 늑사자와 중경상자가 속출하였다.

16.30분경, 무자비한 차량돌진공격에 임산부를 둔 정중사가 차에 깔려 즉사했다. 경찰관 4명도 즉사하고 5명이 다친건 위에서 알려진대로다. 한번은 대대장이 권총으로 돌진해 오는 차량바퀴를 향해 발포하여 몇 번 늑사를 면하기도 하였다. 이때가 5.18사태 2번째 총소리였다. 22.00경 전남대학에 100여대차량이 돌진해 와 경계 계언군 1명이 깔려 즉사하였다. 이미 계엄군은 수적이나 물리력으로도 열세에 몰려 식사공급도 차단당하고, 코앞에서 집단 구타당하며 온갖 흉기로 잔혹하게 생명과 인권을 말살당하고 있었다.

 

. 만남과 화해제의

1. 이미 이루어 진 차량돌진 가해자와 늑사 희생 경찰유족과의 만남과 사죄 그리고 화해 사실과 같이, 수많은 무자비 차량 돌진공격을 감행했던 ‘5.18유공자’ 들은 물론, 특히 이번에는 임신중의 부인을 두고 깔려죽은 정중사 유족에게도 누구인지 나와서 만나 사죄하고 용서받아 화해하기 바란다.

 

. 광주교도소 습격현장 상황

기간중 북괴가 광주소재(?) 수개 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2700명 수감자 중 사상범 170)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계속함에 따라 계엄군은 이에 대비하였다. 이날(5.21) 08.58분에 버스2대와 트럭1대에 분승한 40여명의 습격대가 교도소 앞 정찰시위를 한 것을 시작으로 오전중 수차례 시위정찰을 실시하였고,

12.00시경에는 탈취한 장갑차를 포함 9대의 차량(40명 이상)으로 무장시위대가 총기난사하며 습격해 왔으나 방어 계엄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는 이후 6회에 걸친 교도소습격의 시작이었으며 이날 하루에도 총기난사와 함께 몇차례 계속되었으나 그때마다 격퇴되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7.00, 고속버스2대 분승한 무장시위대가 총을 난사하며 교도소를 습격 방어군과 교전, 상호 인명손실 발생, 이것이 제2차 실사격 교도소 습격상황. 19.30분경, ‘광주해방구’가 되고도 시위대 목적을 다하지 못한 듯, 광주교도소를 기습하였으나 격퇴당하면서 2명이 사살되고,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난사하며 공격해 옴으로서 총겨전이 계속되었다(3차 교도소습격사건). 이 와중에 민간 픽업차량이 지나다 시위대 칼빈 총격으로 2명이 사망하였고, 휘발유 드럼통을 굴리며 지나가던 사람이 부상당하였다.

22 00.40시경, 고속버스 등 3대에 분승한 무장시위대가 기습공격(4)해 오고, 특히 09.00시에는 6명 특공조가 2.5톤 트럭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람보식’으로 공격해와 격퇴당하면서 3명 사망 수명 부상하였다.

 

. 상무대 군통합병원을 공격 점령, 군인 아파트 난입, 요원 겁박 현장

5 2200.05~17.37분 사이, 시내는 물론 지방에서는 예비군중대와 군부대를 무력공격하고 무기와 차량탈취하고 시가지를 누볐다. 특히 고층건물 옥상에는 기관총을 거치하고 수시로 난사하였다.

특히 상무대 지근거리의 아파트 등에 난입하여 군인가족을 색출하고 인질극을 연출함으로서 죽음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난동하였는데, 무장시위대 스스로 총기 난사로 6명부상하였다.

17.00무장시위대는 상무대 지근거리의 군 통합병원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군의관과 간호장교 등 요원을 모욕하며 겁박하였다. 이 병원을 탈환하기 위한 교전에서 계엄군 1명 전사 4명 부상, 시위대 3명 사망 10명부상하였다.

 

. 군용차량 탈취, 17개군 38개 무기고를 동시에 습격, 무기탈취 현장

21 08.00, 증원군으로 20사단 장병이 기차로 내려오고, 지휘부 차량(별판 찦차 등)은 별도 캄보이로 이동하여 막 광주입구 톨게이트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난데없이, 사전에 군대이동정보까지 입수하여 잘 조직되고 훈련된 것으로 보이는 시위대300여명 일당이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이 차량대열을 화염병과 곤봉으로 공격하여, 지휘용 찦차(별판이 달린 차도 포함) 14대와 소총 4, 기타 탑재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이들 집단은 누군과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기 계획된 목적지 ‘아시아 자동차’(군용 자동차 생산공장)로 직행하여, 09.00경 그곳에 도착한 300여명 또 한 조직집단과 합세하여, 위력과 기만으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등 328대를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즉각 또한 계획대로 전남지역 17개 시군 산재 38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사이(12.00~16.00)에 광주로부터 100킬로미터 거리의 무기고까지 정확하게 도착하여 무기를 동시에 탈취하여 무장하고, 14~15.00에는 이미 보병연대급 그리고 헬기에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수준으로 무장하였다.

. 도청앞 잔인한 무장시위대 공격과 계엄군의 조건 반사적 자위권 발포

그리하여 11.00, 수만의 군중앞에 장갑차와 대형버스 수십대 등에 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도청앞 계엄군을 향해 압박해 들어왔다. 이에 대대장은 경계용 실탄 10발씩을 각자에게 분배하고 의명사격을 지시했다. 이미 도청 인근건물 옥상에서 기관총 무장 시위대에 의한 지상 위협사격등으로 더욱 절박해진 위기에서, 대치 무장 시위대가 예의 잔인한 ‘중차량 지그재그 돌진’을 감행해 오자 본능적으로 자동반사적으로 돌진 살인차량을 향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계업군은 발포하였다. 전남대 앞에서도 차를 앞세워 돌진해 오는 무장 시위대에 밀렸다가 다시 반격하는 동안 상호 수차례 교전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3.00경부터 10여만 군중에 탈취한 장갑차들과 100여대의 대형차량으로 공격해 오면서 전위대는 식칼, 도끼, 쇠파이프, 그리고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2~3미터 거리까지 돌진공격을 되풀이하여 , 계엄군 2명이 장갑차에 치어 1명 즉사 1명 중상당하였다. 잠시후 다시 공격해 와 계엄군은 본능적, 조건반사적으로 장갑차를 향해 발포하였다.

15.00경부터는 무장 시위대가 마치 아랍민병대처럼 무제한 무절제 총기난사하면서 시내를 누비고, 고층옥상에는 기관총을 거치하여 헬기에 조준사격도 하였다.

17.00시경에, 도청방어부대가 포위망을 뚫고 긴급 탈출하는 과정에서 33명이 사망(기타 사망 20, 총상 13)하였는데, 그중 9명이 카빈총, 4명이 총기불상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계엄군이 학교 주둔지에서 철수하며 극렬시위 연행자를 후송하다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수명발생하였다.

18.00이후 도청이 무장시위대에 점령되자 광주시내는 무정부상태로 이른바<광주해방구>가 되었다.

19.30분경, 전남대에서 외곽으로 철수중 무장시위대의 차량과 실탄공격으로 장교와 병 2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하였다. 이날 시위대 및 일반인 사망자가 61명이 발생했으나 이 중 61%는 계엄군과 무관하게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만남과 화해 제의

 

1. 상당수의 북한간첩을 수용하고 있는 교도소를 6회에 걸쳐 총기를 난사하며 점령/해방을 시도한 시위대의 지휘자와 희생자 가족들은 당시 교도소 방위 계엄군 지휘자와 만나, 왜 당시 희생자를 내어가며 기어이 교도소를 해방시키려하였는지를 고백하고 사죄하면서 진실을 통한 화해를 하라. ‘규명위’는 시위대의 교도소공격에 관한 진실을 규명/확인하고 국민에게 공개하라.

 

2. 작전이동(캄보이) 중인 지휘차량행렬을 습격한 300여명을 지휘한 자와 아시아자동차로 직행해 온 300여명 조직원들의 지휘자는 당시 차량종대를 지휘했던 군 캄보이 지휘자들과, 그리고 아시아 자동차 공장 책임자와 만나 사실을 고백하고 사죄하면서 화해하라,

3. 또한 600여명이 마치 기계획인 듯 일사분란하게 지방 예비군 무기고로 출발, 오후 4시 전후까지로 습격하고 무기 탈취에 성공한 지휘자는 그 목적과 그 구성요원의 성격 그리고 그 작전능력 등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국민앞에 소상하게 이실직고 해 주기 바란다.

4. 국군통합병원을 점령하고 군의관과 간호장교를 겁박한 당시 무장시위대 지휘자는 당시 군의관과 간호장교를 만나 그 이유를 이실직고하고 사죄하여 화해하기 바란다. 또한 상무대에 가까운 민간아파트에 난입해 인권을 유린했던 무장 시위대 지휘자도 당시 겁먹고 떨었던 군인가족과 만나 이유를 말하고 사죄하여 화해하기 바란다.

 

5. 그동안 가상영화 소위 [화려한 휴가]로 광주시민과 온 국민을 의아하게한 이 소위 ‘집단발포사건’ 현장의 계엄군 지휘자와 당시 도청앞 대형차량과 장갑차, 그리고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하여 게엄군과 10여미터 거리에서 지그재그로 돌진을 반복했던 시위대 지휘자와 그 현장에 있었던 차량기사 또는 누구든지, 그리고 [화려한 휴가]의 제작진들이 함께 만나, 계엄군이 극악상황하에서 현장을 이탈하며 자위발포한 사실을, ‘집단발포’, ‘집단학살’ 등으로 표현하여 현장의 계엄군과 귀가 엷은 국민을 자극한 사실을 상기하고, 당사자 상호간에 당시 상황을 말하고 사죄하며 용서하면서 화해하라.

6. 전남대를 철수하면서 그동안의 연행자까지 동반 철수과정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발생한 불행한 사상사태에 대해 당시 현장 계엄군 지휘자는 당시 희생된 유가족과 만나 사실을 해명하고 사죄하고 용서하여 화해하기를 바란다.

. 특히 ‘규명위원회’는 이번만은 역사적 현장에서 진실규명이 이루어져 모든 의문이 풀리고, 그래서 화해와 화합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적 사명을 재인식하고 이번만은 후회없는 노력을 다해주기를 바란다.

 

맺음 말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제 ‘5.18 현장’의 만남과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민간희생자 못지않게 공권력(계엄군경)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이 조속히 있어야할 것이며, 동시에 [규명위원회]가 공간적 사실적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대면하여 진실을 규명하고 확인하게 됨으로서 국민화합은 물론 오월정신도 바로세워져야 할 것이다.
이를 계기로 4.3사건을 비롯하여 그동안 있어왔던 모든 친공 또는 반 대한민국 역사상 있어왔던 무장시위사태와 폭동 그리고 반란사건 등에 대해서도 현장과 당사자들의 고백과 사죄,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 온전한 진실규명과 함께 역사적 국민통합의 길로 나아 갈 수 있기를 또한 소원해 맞이 않는다.

-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연구회 대표 문영일(육군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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