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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광장

자랑스런 육사인상-2004장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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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곤 박정희 장우주
장우주 동문 공적
 
I. 국가안보와 사회발전 기여
 
1. 오직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다.  
 
장우주 동문은 47년 육사 3기를 졸업 후, 일선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50년 육군본부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하였으며 백전투사령부와 전쟁 중 중부 전선에서 새로 창설한 2군단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휴전을 전후하여 6사단 참모장과 7연대장을 역임하고 54년 제 1야전군 창설에 참가하여 휴전선의 전력증강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59년에는 국방 대학원 교수부장, 61년 3사단장, 그리고62년부터 65년까지 국방부 기획 조정관, 군사 정전의 한국수석대표, 국방부 관리 차관보 등의 직책을 역임 하였고, 67년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으로서 육군의 발전 정책과 국가 대전략과 예측되는 정보화 시대의 육군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고 1970년 군문을 떠나 외국 유학길에 오를 때까지 군 창설기의 시련, 6.25 전쟁, 휴전, 4.19와 5.16 혁명 등 가장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장 장군은 언제나 굳건히 군의 본연의 자세를 견지했고, 오직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순수한 군인의 길을 걸었다.
2. 위기를 기회로 만든 탁월한 지휘관
 
61년 3월 제 3사단장 (백골부대)으로 철의 삼각지대 금화지역 휴전선에서 적침을 막고 철통 같은 경계태세를 갖추는데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해 5. 16 군사 혁명이 일어나서 군의 지휘계통이 무너져 지휘관들이 우왕좌왕하는 혼란 속에 빠졌다. 이 때에 장 장군은 서슴지 않고 사단 주요 지휘관과 참모들을 소집하여 "나의 결심은 간단 명료하다. 국가와 국민이 나에게 부여한 임무는 북으로부터의 공산군 침략을 막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여 자유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평화롭게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단 전 장병은 정치개입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군 본연의 임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북쪽을 바라보며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위하여 여하 한 사람도 내 허가 없이 사단지역을 떠날 수 없게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사단 후방경계선 초소병력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경계를 강화하여 내 명령을 강력히 지키게 한다"라고 말했다. 사단장의 이러한 조치로 3사단은 일사불란한 지휘체제를 확립하여 혼란기를 도리어 사단장을 중심으로 전 장병이 일치 단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것을 계기로 백골부대(18연대) 전통을 3사단 전체가 계승하여 백골사단으로 하고 구호도 "백골"로 통일하여 5. 16이후의 휴전선 방어 태세 강화에 노력하던 중 동년 8월 25일 비무장 지대 내에 있는 우리 초소에 북괴군의 기습공격이 있었는데, 사단은 즉각 이에 대응 교전 끝에 적을 격퇴함은 물론 과단성 있는 사단장 결심 하에 최근 거리에 있는 적 초소에 50미리 기관포탄 600발을 집중 사격하여 완전 제압하였다.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휴전협정위반이라는 문제가 야기되었지만 당시,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이 이 보고를 듣고 "사단장은 그 만한 기백이 있어야 해!"라는 말씀을 하셨다. 얼마 후에 제 1군에서는 사단장급 이상 전 지휘관을 3사단에 소집하여 이 건에 대한 사례발표를 갖게 하여 휴전선에서의 경계태세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 해 10월 3사단은 지휘검열 최우수 부대, 사격대회 우승, 전투태세모범부대로서 윤보선 대통령, 박정희 의장, 송요찬 내각 수반, 박병권 국방장관 임석 하에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장 장군은 그 후 박병권 장관에 의하여 국방부 기획 조정관(1급) 뒤에 차관보로 임명되어 국방부에서 역사에 남을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3. 월남파병
 
장우주 동문은 1962년부터 65년까지 국방부 기획 조정관과 관리 차관보를 역임하면서 국방부 기구 개편 위원장으로 오늘과 같은 국방부와 합동 참모 본부기능을 갖게 하였고, 국군의 제도개선, 미국의 근원이관 계획 등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UN군사 정전위원회 한국 수석대표로 미국을 위시한 UN군 대표단과 중립국 감시단과 협력하여 휴전 10년을 맞아 긴장된 휴전선에서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원활히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큰 업적은 월남파병에 있어서의 그의 역할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 한국군 파월문제는 간헐적으로 1963년 이전에도 제기되었으나 1964년도 4월부터 김성은 국방장관이 적극적인 자세로 장 장군을 월남에 파견하여 한국군 파월문제를 실질적으로 심도 있게 협의토록 하였다. 당시 월남 합동 참모회의 의장이었던 티우장군은 장 장군이 사이공비행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체류기간 중 장 장군과 장차 한국군이 주둔하게 될 예상지역을 포함하여 여러 전투지역과 후방지원시설까지 안내하고 일의 중요성을 인지, 신상철 주월 대사와 한국 무관도 함께 행동하였다.
8일 간의 현지 답사를 마치고 월남을 떠나기 전에 월남의 칸수상, 키엠 국방장관 그리고 티우 합참의장과의 회담에서 공병부대와 의무부대 등은 가급적 속히 보내주고 전투부대는 차후에 파견요청을 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
김성은 장관은 장 장군의 귀국보고를 받고 즉시 박 대통령께 보고한 후 장 장군을 이번에는 미국으로 파견, 국무성과 국방성에서 한국군 파병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하게 하였다. 장 장군은 그 후에 국무성의 번디 차관보 국방성 맥노우튼 차관보를 주축으로 월남파병 협의를 하고 서울과 워싱턴을 왕래하면서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유엔군 사령관 하우즈 대장과 국방부 고문단장 에드워드 장군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월남정부에 대한 협조를 포함하여 역사적인 월남파병에 대한 우리 측 정책수립과 협상을 김성은 장관을 모시고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 하기 얼마 전에, 월남정부 외무부는 한국 외무부로 한국군 전투부대 파견을 요청하는 공식서한을 보내왔다.
월남 파병이 대통령 방미의 주 의제가 되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방미 준비회의를 청와대에서 직접 주재하였는데 대통령은 장 장군이 그 사이에 준비했던 월남 파병에 대한 모든 계획과 대미 교섭안 10개 항에 대한 보고를 받고, 면밀히 확인한 후 원안대로 승인하였다.
이어서 대통령은 월남파병에 따른 경제 분야 계획에 대한 보고를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으로부터 받고는 월남파병에 따른 경제분야 요청 안을 국방부에서 일괄하여 협상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심을 하고 경제관계 요청서를 국방부 안건에 포함하되 명칭을 한국군 월남파병에 따르는 후방지원확대계획이라는 항목을 국방부 안에 추가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국방부가 군사, 경제분야를 종합한 협의안을 준비하여 1965년 5월 17일 박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워싱턴에서의 양국정상회담에 이어 미국방성 요청에 의하여 미국측은 맥나마라 장관과 맥노우튼 차관보, 한국 측은 김성은 장관과 장우주 차관보 네 사람만이 참석하는 회의를 맥나마라 장관실에서 가졌다.
이 회담에서 우리 측 안을 설명하고 토의가 진행되었는데, 월남에 우리 부대를 파견하면 파견되는 부대규모와 동일한 규모의 한국군을 증편하고 신장비를 공급해주는 문제와 장병전투 수당문제에 있어서 이견이 있었으나 장시간 진지한 토론 끝에 미국 측은 한국 측 안을 대부분 원안대로 받아들였다. 이어서 양측은 이 일들을 시행하기 위한 한미 합동 위원회를 서울에 설치하여 시행에 옮기도록 하여 역사적인 월남파병이 확정되었다.
월남 정부는 이 때의 장 장군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1965년 월남최고 훈장인 금관훈장을 수여하고 1968년 티우 대통령은 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미국정부는 기간 리지온 오브 메리트 훈장을 수여하였다.
4. 남북회담의 물고를 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8월 역사적인 남북회담을 시작하면서 회담을 준비하고 총지휘할 남북회담사무국총장으로 장우주 동문을 임명하였다. 박 대통령이 장 장군을 임명한 것은 평상시 군에서 장 장군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과 국제문제를 연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UN군사 정전위원회 한국 수석 대표로 비교적 오랫동안 공산당과 협상한 경험 등을 고려하여 이루어진 인사였다.
그 당시 공산당과 총칼을 맞대고 싸운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 중에서도 공산당과의 회담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 장군은 특히 공산당과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만적 농간에 빠지는 것 뿐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번 남북대화는 미국의 세계전략방향이 냉전에서 긴장완화로 전환하는데 상징적인 뜻이 있는지는 몰라도 회담의 앞날은 험하고 오랜 기간이 걸 임을 국민에게 알리는 노력도 아울러 하였다.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제1군 사령부였다. 그 곳에서 장 장군은 군사령관과 각급 지휘관들에게 회담내용을 상세히 알리고 휴전선의 경계태세가 강화되어야 회담을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절대로 공산당 술책에 넘어가지 않도록 할 것임을 다짐하고 일선 지휘관들의 이해와 협력을 요청하였다. 공산군과 싸운 역전의 용사 지휘관들은 즉시 모든 것을 이해하여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담을 준비하고 진행시키면서 국내 외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 각 분야의 반응을 고려하면서 회담업무 전체를 이끌어 나간 장 장군의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국을 위시한 우방과의 협조와 공산진영을 포함한 범 세계적 홍보 등 온갖 노력을 다하여 판문점에서의 1년 여의 예비회담을 거친 후, 1972년 8월 역사적인 남북회담 본 회담을 평양에서 갖게 하여 남북 교류의 물고를 틔웠다. 그리고 72년 9월 13일 처음 서울에서 열린 북측 대표단과의 역사적인 제 2차 본 회담을 무사히 개최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이 보여준 절대적 성원과 세계적인 관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남북회담을 계획하고 오랜 예비회담을 거쳐 서울과 평양에서 서로 왕래하면서 분단 27년 만에 민족통일의 긴 장정의 길을 열어놓은 장 장군의 업적은 역사에 기리 남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로마교황은 장 장군에게 특별 강복장을 수여하여 그 공을 높이 치하했다. 국내에서는 뒤늦게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겸손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룩한 장 장군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적십자 인도주의 최고훈장인 인도장 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공로 패에는 "민족통일의 기반을 이룩하는 남북회담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하여 역사적 사명감과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회담업무 수행을 총지휘한 장 장군의 탁월한 능력과 빛나는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5. 통일을 위한 한미 협력체제의 구축
 
장 동문은 학생 때부터 조국 독립에 대한 열의가 남달리 강했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자유에 대한 그의 집념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군에 있을 때 처절한 전쟁터에서, 분단된 조국의 휴전선에서, 서슬이 시퍼런 판문점 협상테이블 그 어디에서나, 더 나아가 사회에 나와서도, 전 세계 어디에 가든지 그의 조국통일에 대한 열정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상당기간 그의 통일의 집념을 달성하는데 미국, 소련, 중국 그리고 일본의 국제 역학관계에서 통일 방안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 장군은 남북회담을 직접 책임지고 진행하면서 언제부터 인가 통일은 초강대국 미국의 협력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평소 지론인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한국의 이해관계는 궁극적으로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본정신에 입각하여 한미간에 경제적으로 공동 이익이 되는 한미 양국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였다. 두 나라가 번영을 이룩하면서 이를 우리의 궁극적 목적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1974년 한미경영재단을 설립하여 통일을 염두에 둔 한미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을 오직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 하여왔다.
한미경영재단이 하고 있는 일들 중 금년(2003)의 예를 들면, 장 동문은 2월과 3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뉴욕, 뉴저지, 아이다호주 기업인들에게 북핵과 한국경제 여건에 대한 강연을 통해 이해를 촉구하고 8월에는 미국 태평양 연안 5개 주와 10월에는 미국 동남부 7개 주와의 한미 합동회의에 참가하였듯이 한미관계에 있어서 그는 한미간의 경제 번영을 통한 통일자유한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한미협회의 운영위원으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도 통일에 있어서의 미국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며 더욱이 한미 친선 행사 때마다 장 장군이 50명 내지 100명의 육해공군 장군들을 초청하는 것도 그러한 뜻에서 였다.
장 장군은 언제나 "우리는 육사에서 거수경례를 할 때마다 통일! 이라고 외쳤다. 그 통일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통일을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는 세계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재단법인 한미경영원은 한미 경제 협력 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제경제협력 증진에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1987년 3월 당시 미국 웨스팅하우스 사장이면서 주한 상공회의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한 토마스 브라운 회장은 한국경제신문으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경영인에 대한 질문을 받고 기고문을 통해 "많은 한국 경영인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잊을 수 없는 경영인을 말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장우주 씨를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서두로 그 이유를 신문에 개제한 바 있다.

II. 국가경제발전 기여
 
1. 한국 건설업체의 해외진출
 
1975년 1월 한국정부는 중동 국가들이 오일쇼크로 인하여 많은 자금을 갖게 됨으로써, 한국 건설업체의 해외진출을 국가적 대사업으로 결정하고 현대, 동아, 대림, 삼부, 극동 등 상위 25개 건설회사로 컨소시엄회사를 설립, Korea Overseas Construction Corporation을 창설하고 초대사장으로 장우주 동문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장 동문은 공병이 아니고 보병이었기에 한사코 그 직책을 고사하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건설장관에게 이 일은 중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하여 과거에 미국과 여러 직책에서 긴밀한 협조를 한 실적이 있는 장 동문이 나라를 위해 한 번 더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장 동문은 KOCC대표이사 국제 담당 사장으로 회사설립을 마치고 열사의 사막에 25개사를 이끌고 동분서주 하면서 사우디 왕실위원회에서 발주하는 대부분의 큰 공사를 수주하게 된다. 당시 그 곳에는 주한 미국대사로 있던 포터 대사가 주 사우디 미국 대사로 있었고, 1963~64년 장 동문과 판문점 대표를 같이 한 씨드락 장군이 그 곳 미국 건설회사 책임자로 있었으며, 그는 장 동문에게 많은 조언을 주곤하였다. 그리고 사우디 왕실 위원회 위원장은 사우디 고위인사 이지만 그 아래에 공사 발주 실무를 대행하는 기관으로 미국 벡텔 건설회사가 사우디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파슨즈 사가 서부지역, 중부에는 미군 공병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식 공사 발주 방식을 잘 아는 한국 업체들은 대부분의 큰 공사를 수주하여 막대한 외화수입은 물론 수 만 명의 한국 기술자와 근로자들이 기술축적을 하여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했다. 장 장군은 열사의 사막에서 온갖 노력을 다하여 25개 사에 대한 공사수주에 임하다가 75년 말에 독일 프랑크 프루트에서 뉴욕으로 공사계약차 비행기로 가던 중, 과로로 비행기에서 졸도하였다. 그는 영국 히드로우 비행장에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그 곳에서 치료를 받고 정신력으로 여행을 계속하여 공사 계약을 끝까지 마치고 귀국할 정도로 위국헌신의 정신으로 한국 25개 건설회사의 해외진출 기반을 조성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의 요청으로 장동문은 현대건설사장으로 중동과 동남아에서 20세기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하는, 쥬베일 산업항공사 (9억 3000만불)를 위시하여, 비행장 해군기지, 육군기지, 항만, 정유공장, 담수화 프랜트, 조선소, 교량, 발전소, 도로, 대형건축물 등 수 많은 공사를 수주 시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2. 무역증진
 
한국정부가 단군이래 처음으로 100억 불 수출을 달성하여 경축일색의 1977년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장 동문은 현대종합상사 대표이사 사장, 즉 현대 그룹의 무역창구 책임자로서 그룹 회장을 모시고 임직원이 단결하여 피땀어린 수출 드라이브를 전개한 결과, 현대그룹 (종합상사와 중공업 실적)이 한 그룹으로서는 기적적인 국가 전체 수출의 10분의 1, 즉 10억불을 달성한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격려와 축하를 받았고 아울러 은탑 산업 훈장과 수출 공로탑을 수여받았다.

III. 모교와 육사 총동창회에 대한 기여
 
1.
장 장군의 모교와 총동창회에 대한 사랑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장 장군은 총동창회 제 2대회장으로서1997년부터 99년까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창립된 지 얼마 안된 총동창회의 기반조성과 회원들의 인화 단결 그리고 총동창회의 대외적인 명예와 위신을 드높이는데 노력하고 외국 육사총동창회의 규정과 운영 등을 연구하여 우리 실정에 맞도록 총동창회 정관과 제 규정을 제정하고 원칙을 존중하는 총동창회 운영의 기반을 이룩하였다.
2.
이어서 2000년부터는 육사발전기금이사장으로서 한국 사회와 경제가 어려운 속에서도 100억원 목표를 달성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발전기금이 있어서 생도들이 재학 중 외국 견학을 할 수 있게 한 것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육사발전에 조용하면서도 실속 있는 봉사를 하고 있다.
3.
또한 2003년도부터는 육사인의 사회 진출 후원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육사 출신의 사회 진출을 후원할 수 있는 제도를 강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옛날부터 그의 후배 동문들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1970년 장 장군이 군에서 예비역으로 전역하면서 육사 후배들에게 주는 선물로 주로 소령, 중령 급 장교 15명을 선발하여 이스라엘에서 군사 교육을 받게 한 일이다. 이것은 장 장군이 한국과 이스라엘이 1964년 국교정상화를 할 때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도와준 인연으로 이스라엘 정부(수상 골다메이어)에 대하여 주한 이스라엘 대사와 함께 한-이스라엘 장래를 위해 한국 장교들의 이스라엘 유학이 유익하다는 건의를 한데 대하여 이스라엘 정부가 항공여비, 체제비는 물론 경비 전액을 부담하여 15명 전원을 받아주어 장 장군의 후배들에 대한 유학 선물이 이루어 졌는데 그 중에는 뒤에 국가 요직에서 활약한 최찬욱, 임동원과 같은 인물들도 배출되었다. 당시 간사를 지낸 동문의 말에 의하면, 장 장군은 이 때 장교들이 이스라엘에서 교육을 마치고 귀국할 때, 유럽을 경유하여 견문을 넓혀 돌아오게 하는 자상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장교들이 귀국했을 때 장 장군은 이미 군을 떠나 미국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군 문을 떠나는 마당에 후배들에게 이런 선물을 구상하고 실현시킨 장 장군의 숨은 일화는 오래 육사 동문간의 미담으로 남을 것이다.

IV. 사회봉사
 
1.
장 동문은 1973년 국제 라이온스의 봉사정신에 호응하여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립된 외국인 혼성 새 서울 라이온스 클럽의 초대회장으로서 그 해 석유파동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울 때 나자로(나환자수용소)회의 이경재 신부의 후원요청을 받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주한 외교관, 미군 그리고 국내 저명 인사들을 초청, 조선호텔에서 자선 모임을 갖고 구호 성금을 전달, 그 해 월동을 무사히 넘게 한 것을 시작으로 사회봉사에 참여하였다. 1987년부터는 국제 로타리 회원으로 봉사를 계속하다가 1994년 한국 로타리의 원조 격인 한양 로타리 클럽 회장으로서 처음으로 신체장애자 수용소인 라파엘의 집, 청운양로원, 독신모의 아기들을 돌보아 주는 아기둥지, 세 군데를 선정하여 구호의 손길을 뻗기 시작하여 지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으며, 현재도 로타리 3650 지구 국제봉사위원장으로서 오랫동안 묵묵히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2.
한미친선과 사회봉사를 위해 장 동문이 스폰서가 되어 설립한 어머니 합창단 회원들은 외국 노동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 공연도 하고 촛불 시위로 한미 관계가 한창 어려울 때 주선하여 합창단 40명이 2003년 4월 4일 미 2사단에서 미국 어머니들의 마음을 헤아려 장병위문공연을 하게 하였고 8월 6일에는 8군 사령부 용산 기지에서 미군들을 위해 한미 친선공연을 하게 한 바 있다. 그리고 장 동문은 한국에 와 있는 외국 유학생들의 스폰서를 하여왔으며 현재도 위스컨신 주에서 온 미국고등학생의 스폰서를 하고 있고, 지난 6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미 웨스트 포인트 생도들 중 뉴욕 주에서 온 생도의 스폰서로서 한국을 알리고 좋은 추억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3.
육사 총 동창회장으로 있을 때도 육사 동문들의 지역 사회봉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회장단 임원들과 함께 양로원, 신체부자유자 시설, 미혼모자 수용소 등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봉사를 하여 동문들의 사회봉사 관심을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항상 "부하들의 피땀과 동료들의 희생에 의하여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항상 공손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에 등불을 비추는 봉사활동을 강조한다.

V. 결언
 
국가안보, 경제, 사회분야는 물론 모 교와 총동창회에 대한 기여,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로 조용히 오랫동안 사회봉사를 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재도 심신단련을 열심히 하고 한미경영재단을 위시하여 육사발전기금 이사장 등 여러 직책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슈퍼맨 다운 그 모습 자체도 자랑스러운 육사인이라고 생각한다.

◆ 이력서
 

1. 약력
    성 명 장우주 (張禹疇, Woo-Joo Chang)
    현주소 서울시 강남구 도곡2동 467 타워팰리스 A-3901
    사무실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59 무역센터 4008호
    전 화 753-7750
    팩 스 561-6921
    E-mail kabifj@unitel.co.kr
    Homepage www.kabi.or.kr

2. 학력
    1947 육군사관학교 졸업
    1953 미 보병학교 졸업
    1956 미 지휘참모대학 졸업
    1959 국방대학원 졸업
    1971 미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AMP)

3. 군 경력
    1953 6사단 참모장
    1954 제 7연대장
    1957 육군본부 인사국차장
    1959 국방대학원 교수부장
    1961 보병 제 3사단장
    1963 UN군사정전위원회 한국수석대표
    1965 국방부관리차관보
    1968 육군본부 정책기획부장
    1971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 총장
    1973 하바드대학 경영대학원 한국동창회장
    1974 재단법인 한미경영원 대표이사(한미합작)
    1975 ㈜ 한국해외건설 대표이사
    1976 현대종합상사 사장 겸 현대종합기술 사장
    197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겸 현대특수화학 사장
대한 알루미늄 사장(한불합작)
    1981 현대 한라건설 사장
    1986 ㈜ 파슨스 퍼시픽 회장(한미합작)
    1987 재단법인 한미경영원 이사장(현재)
    1988 미국 아이다호주정부 한국대표(현재)
    1991 주한피지공화국 명예총영사(현재)
    1996 피지공화국 관광청 한국대표(현재)
    1997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회장
    1999 미국 뉴저지주정부 한국대표(현재)
    2000 (재) 육군사관학교 발전기금 이사장(현재)
    2002 아시아ㆍ태평양환경NGO한국본부 총재
    2003 한국 국제 경영협의회 회장(현재)

4. 상훈
  국내   1951 금성화랑무공훈장
      1952 은성충무무공훈장
      1961 대통령표창장
      1969 보국훈장 천수장
      1977 은탑산업훈장
      1977 3억불수출탑
      1991 적십자인도장금장
  국외   1954 미동성무공훈장
      1964 미지휘관공로훈장
      1965 월남금관훈장
      1968 월남보국훈장
      1968 자유중국운휘훈장
      1968 태국백상무공훈장
      1972 로마교황특별강복장
      1981 하바드대학 공로표창장
      1995 피지건국공로훈장
      1999 멕시코 수교훈장
      2002 피지 최고명예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