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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광장

자랑스런 육사인상-2004김점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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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곤 박정희 장우주
김점곤 동문 공적
 
1948年 麗順叛亂事件時에는 光州 臨時司令部의 參謀로 活躍하였으며 그後 一線戰鬪部隊의 指揮官으로 討伐作戰을 指揮하여 1950年 春季 湖南地區 共匪소탕 戰을 완전 成功시켰습니다.
1950年 6월 6ㆍ25戰爭이 勃發하자 하루전인 25日 陸本 情報局次長에 취임했던 그는 다음날 6月 26日 第1師團 12聯隊長으로 自進出戰하여 汶山地區에서 家族을 서울에 남겨둔채 首都가 敵에게 占領된 後인 29日 새벽까지 싸웠으며, 落東江戰線에서 戰爭中 가장 치열했던 多富洞 決戰, 이른바 韓國 最後의 橋頭堡를 9月까지 死守하고 反擊의 契機를 조성, 第8軍의 反擊動機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0月 19日 聯隊를 指揮하여 白善燁 師團長과 같이 平壤에 제일 먼저 突入함으로서 美第1機甲師團과의 占領競爭에서 15분 앞섬으로서 赤都入城의 榮譽를 韓國軍에 안겨 다 주었읍니다. 이 작전에서 韓國軍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군전차 2개 중대를 배속받아 步戰協同戰을 전개했습니다.

北進을 계속하여 博川, 雲山, 泰川地區戰鬪에서 侵攻해오는 中共軍을 沮止遲延시키는 作戰을 遂行하였읍니다. - 別添 戰史 證言參照
1951年 4月 中共軍의 春季攻勢때 西部戰線의 高梁浦地區에서 完全包圍孤立된채 72時間 以上을 奮戰하여 敵의 서울 再侵을 沮止하는데 成功하였읍니다. - 別添 戰史 證言參照

梨花大學에 聯隊指揮所를 두고 구파발 부근에서 中共軍과 激戰을 벌려 이를 물리쳤습니다. 이 戰鬪中 그는 戰病傷으로 6개월간 釜山 陸軍病院에 入院中, 1951年 末부터 智異山地區 共匪를 完全히 소탕한 大作戰에서 白戰鬪司令部의 參謀長으로 司令官 白善燁 將軍을 補佐했습니다.

1952年 10月 第9師團長으로 狙擊陵線 作戰을 完勝으로 끝마쳤으며 第9師團을 白馬師團이라 命名하는 동시에 師團表識을 白馬로 제정하였읍니다.
그後 陸軍本部人事局長에 補職되어 陸軍의 20個師團으로의 增編作業을 主導하였으며 1953年 7月 攻勢시에는 7月 27日 停戰의 瞬間까지 第6師團長으로 反擊戰을 指揮하여 華川地區의 停戰線을 現 戰線까지 北上시키었읍니다.
停戰後 野戰軍司令部(現 1軍司) 參謀長으로 美第8軍으로부터 作戰指揮權을 인수받는 參謀作業을 하였읍니다.
1954년부터 陸軍步兵學校長으로 赴任하여 美國과 歐洲 地圖를 利用하든 戰術敎育으로부터 韓國地形과 그 地圖를 利用한 戰術敎育과 더불어 韓國戰의 敎訓을 反映한 敎科內容으로 모든 戰術敎科目을 改編하였으며 夜間戰鬪와 夜間射擊敎育에 注力하였고, 韓國軍 最初로 Ranger(遊擊特殊訓練)過程을 步兵學校에 新設하여 現在에 이르고 있습니다.
1957년부터 陸軍情報參謀副長을 거쳐 1959년부터 聯合參謀部長을 역임하였으며, 國防部次官補와 停戰委員會 韓國首席代表로도 勤務하였읍니다.
1961년부터 次官補 在職중에는 「軍人事法」,「鄕土豫備軍法」「「軍年金法」「大韓民國在鄕軍人會法」 등의 法令을 草案ㆍ整備하였읍니다. 또한 現役 將校를 民間大學에 위탁교육하는 制度를 만들어 현재 군은 400여명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62年 退役과 同時에 慶熙大學校 敎授로 초빙됨으로서 世界最初의 野戰戰鬪將軍出身敎授가 되었읍니다. - 약 10年후에 독일 工兵出身 將軍이 교수 자격을 받았음. -
1975年에는 經營行政大學院長과 副總長을 거쳤읍니다.
韓半島의 周邊强大國 - 이를 韓半島에 대한 "4强 體制"라 규정한 최초의 學者이며, 이는 현재 국제정치학계와 국제사회에서 가장 普遍的 槪念으로 通用되고 있습니다.

1959년 聯合參謀本部長 當時 立案한 國家非常計劃案은 1968年 現行 乙支와 忠武計劃의 原案이 되었습니다. 이 作業期間에 「國家安全保障計劃」을 最初로 起草하였읍니다.
68년에는 政府要請에 따라 首都방위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역시 후에 乙支, 忠武계획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聯合參謀本部長 在職時
- 張勉政權 時節에 間諜浸透를 막기위해 海岸線 防禦계획과 그 監視體制를 創案하여 實施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그는 또한 首都와 重要 軍事施設 그리고 后에는 全國的인 防空計劃을 先唱 主導하여 警察通信網을 利用하여 오늘의 防空體制와 그의 따른 國民訓練을 實施케 하였습니다.
- 그는 그가 起案한 國家 防禦計劃에 따라 最初로 政府次元의 戰爭 CPX를 實施한 創案者입니다.
韓國의 學界와 學問에 대해 國家安全保障과 國際安保分野를 政治學界에 導入시키는데 있어 國際政治學會 李用熙 교수등의 협력을 얻어 先導役割을 했습니다.
그는 學文硏究와 더불어 TV와 新聞 媒體를 통하여 南北關係에 관한 계몽에 노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1968年 南北危機時 政府의 要請으로 韓國 最初의 國家防衛 企劃의 草案을 立案하였으며 首都防衛의 重要性을 主唱하였고, 非常時에 대비 大田中央公務員訓練院에 通信軸線과 豫備指揮所를 設置케 했읍니다.


◆ 學問探究의 態度
 
金 將軍의 學問世界는 그 깊이와 幅이 다른 學者들과는 다른 배경이 있는 듯 합니다.
그는 檢定準備時節부터 哲學과 歷史學에 깊은 關心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는 哲學과 歷史學, 人類考古學, 文學作品 등의 공부에 熱中하였으며 젊은 時節의 所願은 考古學者가 되는 것이였으나 1945年 分斷된 祖國을 直視하면서 그는 個人의 所望을 버리고 政治學, 그 中에서도 國際關係를 專攻하였고 더 縮小하면 東北亞地域 연구였으며, 窮極的으로는 韓半島의 南北關係에 歸着하였습니다.
이를 逆으로 전개한다면 韓半島의 南北問題가 그의 일생의 硏究課題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그는 哲學과 歷史의 敎訓을 바탕으로 幅넓은 戰略的 思考로 "問題"에 接近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의 취미는 音樂과 美術, 特히 古美術에 깊은 關心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古美術品에 대한 鑑識眼目은 높은 水準으로 알고 있으나 그는 이에 答이 없습니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信仰은 어머니가 기독교에 歸依하신 后40歲에 出生한 그를 어머니는 하느님이 주신 아이로 생각하시고 또 그렇게 타이르시면서 基督敎 學校에 보내어 普通學校 5年까지 기독교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光州師範附屬學校에 간 것은 6學年때 日帝가 기독교학교를 廢校시켰기 때문이라 합니다.
例컨대 그의 기독교 精神은 韓國戰爭時 아버지와 큰 兄님을 北韓軍에게 密告하여 殺害케 한 人物을 그대로 석방케하여 그가 自然死할때까지 平하게 지내게 하기도 했습니다.

◆ 任官과 特異한 補職, 그리고 特異한 任務와 役割
 
그는 任官과 同時에 統衛部長 特別輔佐官에 任命된 것은 特異한 例이며, 前無後無한 事例입니다. 더구나 卒業式 하루전 釜山 第5연대로 가게 된 것을 統衛部長의 直接 지시로 發令이 되였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까지도 왜, 어떻게 그러한 補職이 이루어졌는지 그는 알지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統衛部長이였던 프라이스 대령이 그에게 非常한 關心을 가지고 있었다는 事實만은 알고 있으나 왜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뿐 아니라 다른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特報資格으로 統衛部 各 局에서 見習勤務를 하면서 比較的 自由롭게 工夫에 熱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大學受講도 可能한 時期였습니다.
그는 后에 統衛部 情報局 作戰情報課長과 諜報課長을 兼하면서 그의 苦悶이 시작되였고 同時에 一生 工夫하는 習慣이 몸에 배게되었다고 합니다.
第1,2次大戰의 事例와 國際聯盟, 國際聯合, 冷戰體制 中國共産黨의 大陸석권, 쏘聯, 日本, 美國 등의 硏究에 余念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工夫들은 后에 東北亞의 强大國 構造와 韓半島의 分斷, 戰爭으로 發展하는 時空속에서 그는 한발 앞서 이에 挑戰할 수 있었던 것을 多幸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形勢는 그이 豫測대로 展開되었고 그 過程에서 그의 「4强論」이 創出되었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 特殊 中隊의 38線 配置
 
中尉에 進級한 그는 1946年 統衛部長 프라이스 大領으로부터 警備隊 時節인 當時로서는 特別한 秘密命令을 받았다고 합니다.
프라이스 大領은 春川-東海岸의 地圖앞에서 春川 - 自隱里 - 上南- 廣院里 - 松川 -注文津을 가리키면서
- 身分을 감추고
- 警察部長 趙炳玉 박사의 警察官에 대한 協助指示書를 가지고
-春川에서 注文津까지 偵察하여 報告하라
- 武器휴대를 禁하며 私服을 입어라
- 쏘聯軍이 38도선을 守備하고 있으니 조심하고
- 이 地圖에서 지금 地形, 地名을 읽켜라. 地圖는 물론 略圖, 메모등 인쇄물의 휴 대를 금한다.
- 萬一 체포되면 「알아서」 살아남도록 해라
- 護衛兵 한 名을 許可한다
그는 金炳華 憲兵 中士를 選擇 했었다고 합니다.
- 后에 그는 金將軍의 建議로 프라이스 大領이 추천서를 써주어 3期生으로 任官했으나 大尉때 6.25戰爭에서 戰死했다 합니다.
5日에 걸친 現地偵察 報告書를 받은 統衛部長은 大滿足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年末에 프라이스 대령은 갑자기 "金中尉가 直接偵察한 곳을 내가 直接 갈터이니 案內하라!는 指示를 내렸다. - 이때는 金 中士에게 칼빈 小銃 휴대를 許可-그와 金中士는 여전히 私服이였고 프라이스 大領은 軍服에 階級章을 붙인 채 春川까지 車로 가서 泉田里에서 도보로 昭陽江 上流을 거너 偵察報告書와 地圖를 對照하면서 깊은 눈길을 헤치며 火田民 獨立家屋에서 자면서 같은 길을 5日걸려 注文津에 당도했다고 합니다.
프라이스 大領은 첫날이 지나자 正確한 報告書를 극구 칭찬하면서 이제부터는 서로 信賴하는 『親舊』라고 宣言 했었다고 합니다.
1947년 初 그는 프라이스 部長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命令을 받게 된다.
- 金中尉는 第8聯隊 直屬의 H中隊長이다.
- 中隊 兵力은 8聯隊 第3大隊에서 差出받는다
- 中隊를 5個 小隊로 編成하여 바로 偵察한 自隱里, 上南, 廣院里, 松川, 注文津에 配置하라 小隊兵力은 約 30名을 基準으로 한다
- 中隊本部는 8聯隊 本部에 둔다
※ 이때 松川의 第4小隊長이 朴正熙 少尉였다.
이 配置는 韓國軍이 38線에 沿해서 配置한 첫 試圖였으며, 當時 38線은 쏘聯軍과 美軍이 對峙하고 있었을뿐 人民軍은 後方에 配置되어 있었으며, 다만 北韓의 保安隊가 쏘聯軍을 補助하고 있을 時期였다고 합니다.
H中隊의 任務는 各地域 小隊로 하여금 現地 警察과 協力하여 地域域警備와 越南 피난민 處理와 그들로부터 對北 情報를 얻어 이를 報告하는 것으로 되여 있었다합니다.
그는 '47年 中半에 中隊長 任務를 마치고 8聯隊 1大隊長을 거쳐 聯隊 副官 S-2, 法務 등 많은 兼職을 맡았으며 '48年 봄에 프라이스 大領의 電報 命令으로 統衛部에 出頭하여 다음과 같은 命令을 받았다고 합니다.
- 將校 20名을 發令하여주면서 諜報課와 作戰情報課를 創設하라는 命令이였다.
- 그때까지 情報局은 將校 2名 뿐 "課"는 없었다.
- 이렇게 發展한데에는 H中隊長 時節 그가 報告한 「北韓情報」가 信賴받게 되어 韓國軍의 情報機構 設置를 촉발시키는 契機가 되었다고 프라이스 大領이 시사했다 합니다.
歸國하게된 프라이스 大領은 그의 이임식 연설에서 "韓國에는 金中尉와 같은 우수하고 信賴할 수 있는 將校와 金 中士와 같은 誠實한 下士官이 있다는 것을 마음 든든하게 여긴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합니다.

◆ 釜山 橋頭堡 戰鬪
 
1사단 12연대장이였던 그는 多富洞戰線에서 戰線의 伸長으로 敵의 戰力이 相對的 消耗가 크고 能力은 急激히 低下되어 갔으며, 釜山港을 通한 UN軍의 兵力과 裝備가 계속 增强, 戰勢은 미묘한 역전 徵候를 보이기 시작했을 時機에 그는 이 움직임을 看破하고 湖南地域 討伐때부터 訓練시킨 聯隊의 別動搜索隊를 顧問들의 協力을 얻어 機關短銃과 백리 手榴彈으로 武裝시켜, 그가 3日間의 직접 訓練으로 敵의 師團司令部를 夜襲시켰습니다. 그 結果 人民軍 師團의 中領 參謀를 生捕하여 그로부터 人民軍 戰力 구조가 最後段階에 이르렀다는 事實을 認知하게 됨으로서 그는 卽時 聯隊의 反擊準備에 着手하였다고 합니다.

當時 前線中隊에는 分隊長이 거의 없는 實情이였으므로 그는 本部의 行政要員 下士官과 古兵들을 果敢하게 前線으로 前進시키고 行政, 給與通信 등의 빈자리를 釜山에서 모병해 온 高卒女軍으로 充當하여다. - 當時의 高卒은 高學歷 士兵이였음. - 51年初가지 계속된 이 方法은 큰 成果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 戰場에서의 補充敎育
 

多富洞 戰線에서 古參兵을 많이 잃게 된 聯隊는 戰力水準이 急激히 떨어지는 狀況속에서 그는 後方에 簡易射擊場을 設置하고 補充되는 모든 新兵들에게 戰鬪할수 있는 水準에 이를때까지 射擊敎育을 시킨 後 前線에 보냈읍니다.
- 이는 激戰中 新兵이 中隊長에게 달려가 實彈장정을 부탁하는 웃지못할 狀況을 報告받은 그가 사람 + 武器 + 精神 + 訓練에서 「戰力」이 生成된다는 信念에서 戰爭前 討伐時에도 直接 戰鬪에서 確認된 狀況을 分析, 判斷하여, 甚한 兵力 不足狀況에서도 1個 中隊씩 빼내어 射擊訓練에서 合格된 中隊를 다시 戰線에 再配置 함으로서 큰 成果를 올린 경험을 激戰場에서도 實踐해 옮겼다고 합니다.
8月下旬 新寧으로 移動한 聯隊는 모든 戰力을 戰線突破와 反擊하는데 集中하였고 北進에 對備하여...果敢하게 聯隊 搜索隊를 12Km以上 침투시켜 반드시 그 部落의 문패를 떼오도록 하여 그 敵情實態를 파악함으로써 北進에 對備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수색대로 하여금 敵의 通路에 對戰車地雷를 매설케 한 結果, 反擊時 軍威로 通하는 交叉路에서 破壞된 T-34 한臺를 確認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敵의 T34 戰車에 2.36인치砲 特攻
 

8月 下旬 落東江을 敢制할 수 있는 第 3大隊 左翼前面에서 전날 밤 160m로 確認한 낙동강의 水深에도 不拘하고 敵의 T34戰車 5臺가 나타나 종일 至近거리의 3대대 陣地를 强打해 왔다. 壕는 散散히 무너지고 많은 犧牲을 내어 將兵들의 士氣는 低下되고 後退가 不可避한 狀況에 이르렀을 때, 聯隊長인 그는 바로 그 3大隊 將校들에게 光州20聯隊에서 2.36인치 로켓砲 훈련을 시킨 것을 想起시키고 卽時 10名의 決死隊 自願者를 손들게하였다. 언덕 뒤 完全死角地帶에 모인 約 1個 中隊兵力은 그가 親히 指揮했던 토벌전투 經驗者들이였다.
그들은 전원이 손을 들었고 그 중 玄德鎭 少尉를 包含한 10名을 뽑은 그는 곧 그 자리에서 2個組로 나누어 水田을 지나 敵 戰車10m 前까지 前進하여 戰車의 側面을 攻擊하자하면서 聯隊長이 直接 指揮하여 出發하는데 갑자기 「聯隊長님! 제가 指揮하겠읍니다.」라고 소리치면서 中隊長인 金成龍 大尉가 뛰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長身의 美男으로 아주 젊은 大尉였으며 머리도 항상 길게 기르고 노래도 잘하고 잘 노는 - 그러나 討伐成果가 別로 여서, 聯隊長 눈에 들지 않은 將校였다고 합니다.
聯隊長과 金대위, 그곳에 있던 모든 將兵이 感激이 눈물로 特攻隊를 보냈고 …大隊와 支援砲兵은 最大의 集中射擊으로 步兵同伴없는 戰車隊와 後方과의 사이를 遮斷했다.
無線으로 直接指揮하는 聯隊長의 指示대로 20分 以內에 2.36인치 로켓砲로서는 韓國戰爭 最初로 5臺의 敵 戰車를 完全파괴하였고 이 戰車 寫眞을 확대하여 人民軍의 迫擊砲 기습에 놀라, 피난을 떠나는 大邱市民들에게 國軍이 이제 이처럼 人民軍 戰車도 부셨다고 홍보하면서 달랜 분은 大邱에 머물면서 시민들을 격려하고 있던 內務長官 趙炳玉박사였다.
戰略的 思考와 創意力, 想像力 그리고 獨斷專行 金 將軍은 初級將校時節부터 積極的이고 幅넓은 戰略的 思考와 獨創的인 想像力을 發揮해 일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그는 이를 實戰에도 適應시켜 成功한 두 戰例만을 들고 있다.


◆ 例Ⅰ
 

다부동에서 軍威와 尙州 추풍령을 넘어 북으로 통하는 진로를 차단하여 敗走하는 人民軍의 중장비와 重武器의 北上을 沮止하고 이를 殲滅하려는 그의 計略을 顧問團이 正面으로 반대하는 가운데, 그는 獨斷으로 북으로 통하는 진로를 瞰制하는 高地의 攻擊을 단행했었다. 이에 顧問官들은 1師團 수석고문과 8軍까지도 反對意見을 보고하여 논쟁이 심각해 졌었다. 이에 師團長 白善燁 將軍은 사단수석고문을 대동하고 攻擊目標로부터 2~3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大隊指揮所보다 훨씬 전방에 있는 연대장의 지휘소는 敵의 결사적인 火力이 集中되고 있는곳을 直接 訪問하여 雙方의 說明을 듣고, 聯隊長의 목표설치가 옳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서 師團顧問들도 이에 찬성함으로서 攻擊開始 3日만에 이 전략고지를 占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부동에서 그 高地앞까지의 道路는 人民軍의 戰車와 自走砲, 車輛 重武器와 武裝등 數個 師團分이 그대로 버려져 있었고 軍馬들은 9月初의 더위에 부폐되어 배가 거대한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戰死者와 섞여있는 광경은 지옥도 바로 그것이었다고 한다. 최근 그는 師團長이였던 將軍을 여기에 案內했고, 두사람의 感懷 깊은 이야기는 KBS TV로 잘 알려진 戰例이다. 重裝備를 버리고, 隊列이 허트러진 敵은 완전히 組織的인 戰力과 戰意를 喪失하고, 一部는 敗走北上 하였으며, 그 외 大部分의 敗戰들은 白頭大幹을 通해 智異山 一帶로 逃走하였다.


◆ 例Ⅱ
 

8軍의 命令에 따라 洛東江에 연해서 最後의 橋頭堡 形成을 위해 第1師團은 遊鶴山 線에 配置를 위해 移動中의 事例이다.
聯隊長인 그는 敵의 追擊이 豫想되는 낙동리 船着場을 中心으로 南岸高地에 討伐軍에서 接近戰 經驗이 있는 豊富한 第3大隊 配置하고 20mm 機動砲도 배치해 주었다. 그의 판단은 이 唯一한 船着場을 利用하여 牙軍이 陣地를 占領하기 전에 기습공격을 加해올 確率이 높다는 想定에 기초한 것이였다.
그러나 師團作戰果서는 그곳에 兵力配置 必要없으니 즉시 豫定된 陣地를 占領해야한다면서 8軍의 독촉이 甚하다 했다. 사단장은 항상 戰將터를 누비고 다니니 部隊長이여서 그는 參謀長 石主岩 大領에게 電話했으나 그역시 같은 독촉과 더불어 한술더떠 軍法會議에 回附되고 싶지 않으면 즉시 撤收하여 새 陣地를 占領시키라는 농반진반의 脅迫까지 보태는 것이었다.
受話器를 놓은 그는 斷乎하게 軍法會議는 내가 받을터니 配置한채 警戒하라는 命令을 채 다 내리기도 전에 敵의 大部隊가 砲兵의 支援射擊을 받으면서 渡河하기 시작했다는 報告가 들어났다.
그는 大隊長과 參謀들을 대동하고 높다른 언덕 陣地에 올라 直接 指揮함으로서 1個 聯隊가 넘는 渡河部隊를 全滅시키고 부상포로도 잡았으며, 지대공 통신수단도 있어 空中支援 요청도 못하고 있던 중 偵察機의 선희를 보고 그는 敵을 향해 예광탄과 신호탄을 있는대로 쏘와대 드디어 미군의 전투기 編隊가 수십차례 공격하고 또 砲兵陣地의 敵을 殲滅시킴으로서 初頭에 敵의 先制攻擊 意圖를 좌절시켜 다부동 전투에 도움을 주었다. - 戰史 낙동리 전투 參照
그가 師團長의 배려로 軍法會議 回附가 없었던 것은 幸運이었다.


◆ 別添 1
 


김점곤 장군의 한국전쟁시의 특이한 공로


1998年 洪晟太 將軍 證言 근간에 획득된 중국측 한국전쟁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이었던 팽덕회의 작전구상을, 한번도 아닌 두번에 걸쳐 실패케 하였던 한국군 부대로 제1사단 12연대(연대장 김점곤)가 지적되고 있다.
첫번째는 청천강 제1차작전시의 고사동 전투, 두번째는 춘계 1차공세시 의 파평산 - 동문리 전투에서이다.
고사동 전투('50. 10.3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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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에 참전한 중공군은 최초교전이었던 운산전투('50.10.25 개시) 후 10.29까지 분산하여 북진 중인 제2군단 예하 각 연대를 축차격멸 함에 성공하자 노출된 미 제8군의 우익으로부터 청천강을 따라 서쪽 으로 우회포위를 실시함으로써 청천강 이북의 제8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코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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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척회의 구상을 저지한 것은, 중공군 제40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상 구동-고사동-묵시동을 연하는 선에서 10.31부터 11.2까지 저지한 12 연대의 선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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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중공군 제40군이 계획대로 진출하였다면 제1사단과 교체 배치된 미 제1기병사단을 위시한 미 제8군의 주력은 퇴로가 차단되어 섬멸되 었을 것이다. 중공군 자료도 12연대의 선전을 인정하고 있다("항미원 조전사", 중국군사과학 출판사, 1988,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역 P.32)
파평산 - 동문리 전투 ('51.4.22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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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 1차공세시 팽덕회의 구상은 포천을 연결점으로 하는 거대한 양 익포위였다. 우익인 제19병단은 임진강을 도하 후 감악산 - 동두천을 경유 포천으로, 좌익인 제9병단은 상해봉 - 만세교를 거쳐 역시 포천 방향으로 진출, 연결함으로써 포위망 내의 유엔군 5개사단을 섬멸하 기로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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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19병단 64군(3개사단으로 구성)의 진격은 영 제29여단에 의 해서, 63군의 진격은 제1사단의 12연대에 의해서 저지됨으로써 팽덕 회의 포위구상은 좌절되었고 따라서 유엔군의 주력인 미 제3사단, 제 25 및 24사단은 큰 피해없이 철수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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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의 야심적인 작전구상을 좌절시킨 것은 제12연대와 영 제29여 단 때문이었다. 4.22 밤부터 25일까지 12연대는 임진강 남안의 파평 산 우반부와 그 남쪽의 동문리 일대에서 중공군 63군의 진출을 지연 시키는데 성공하였다(전계서, P 140). 결국 이것으로 팽덕회의 거대 한 포위구상은 좌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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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것은, 영 제29여단은 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궤멸적인 타 격을 잆었으나 제12연대는 큰 피해없이 선전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중국측의 자료를 입수하지 못하였다면 제12연대의 이 공적은 영원히 밣켜지지 못했을 것이다. 전투에서 상대한 적군이 인정한 공 로가 가장 타당하고 정확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두번에 걸쳐 팽덕 회의 작전구상을 저지하였던 제12연대장 김점곤 대령(당시 계급)의 공로는 뛰어난 것이라 하겠다.

◆ 別添 Ⅱ
 
근간에 획득된 중국측 한국전쟁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 이었던 팽덕회의 작전구상을, 한번도 아닌 두번에 걸쳐 실패케 하였던 한국군 부대로 제1사단 12연대(연대장 김점곤)가 지적되고 있다.

1. 維新憲法 說明會의 退場事件
 
維新憲法 公布前 識者 - 主로 學界와 言論界 幹部 -들에 대한 事前 說明會가 타워호텔에서 崔某, 林某 大統領特別輔佐官에 의해 進行이 되었다.
이때 林某氏가 「朴大統領이 滿軍에 入隊한 것은 오늘의 韓半島 事態와 南北의 對峙를 透視豫見하고 決心한 것이다. 偉大한 指導者는 이런 점이 다르다…」는 論調로 괴변을 계속하자 앞자리에 앉아있던 金將軍이 갑자기 일어나 中央通路를 걸어서 退場하는 事件이 벌여졌다.
이때 入口부근에 모여있든 記者들이 金將軍을 가로 막고 「…이러시면 안됩니다. 화장실로 가시여 손이나 씻으시고 자리로 돌아 가시지요. … 그게 싫어시면 저희들과 같이 여기 계셔도 될겁니다.」 이렇게 걱정과 友情어린 忠告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긴채 끝내 退場 歸家하고 말았다.
그는 집에서 조용히 다가올 것을 기다렸으나 체포조는 끝내 오지 않았으나 그후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事實이다.
「어느 記者의 證言에서-」

2. 12ㆍ12 解明에 대한 一喝事件
 
12ㆍ12 事件이 突發한후 어수선한 가운데 鄕軍會長이었던 李孟基 제독이 어렵게 주선하여 全斗換 將軍을 招請했고 元老이신 李某, 金某將軍과 參謀總長을 지낸 李某 崔某 將軍을 초청하여 事件眞想의 說明會룰 가졌었다. 여기에는 鄕軍會長團과 安保委員長인 金將軍이 배석하고 있었다.
과장된 說明이 끝나자 金장군은 두 元老와 前職總長들이 호통을 칠 것으로 期待하였으나 豫想과는 달리 그들 네분은 서로 앞을 다투면서 全將軍의 勇斷을 찬양하고 고무하면서 對外關係나 對美關係 다 問題가 없으니 所信껏 밀고 나가라는 헛소리를 깊게 늘여놓았다. 그러자 점심시간이 되여 신라호텔로 자리를 옮긴후에도 찬양 發言을 내내 계속되었었다.
食事가 끝날 무렵 더 이상 참지못한 金將軍이 갑자기 「全將軍! 지금까지 元老先輩들이 하신 말씀은 다 眞實이 아니오. 全將軍은 軍人으로서 있을 수 없는 過誤를 범했는데 이 事態는 누가 責任지며 張次 國家에 대해서는 어떻게 한단 말이요. 확실하게 對答하시요!」라는 一喝에 全將軍과 元老들 모두 무거운 沈默에 빠졌고 곧 어디서 銃彈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때 이마를 食卓에 대다싶이 머리를 숙이고 있던 全將軍이 「제가 따로 찾아 뵙고 말씀드리면 안되겠습니까」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에 그는 「나를 찾아오는 것을 원치 않으니 이 자리에서 所信을 밝히시오!」라는 추궁에 「제가 모든 責任을 지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사건은 얼마후 大學副總長이었던 그를 參考人으로 連行하여 4일간 中情에서 「平安」하게 지나게 한 것으로 끝이 났다. 「鄕軍會長團 한분의 證言」
끝으로 正義와 原則의 信奉者인 그는 晩年에 이르러 忍耐와 寬容과 겸양 또한 智慧와 勇氣와 正義와 竝行할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을 半白年 以上을 같이 지내온 어느 軍先輩의 行動에서 배우게 되였고 述懷하고 있다.
그는 平生 사는 집까지도 自己財産으로 가져본 적이 없다. 來日의 運命을 알 수 없는 軍人은 財産이 必要없다는 所信으로 지금도 아들이 마련해준 專貰아파트에 大滿足하고 있다.
그의 財産은 冊뿐이다.
그는 그가 살아온 길을 "現役때는 軍服입은 學徒"였고, "退役後에는 私服입은 軍人"으로 自身을 評하고 있다.

◆ 이력서
 
1923年 4月 15日(陰) 全南光州 楊林里에서 出生하였읍니다.

  姓 名 金 點 坤 ( KIM, CHUM - KON)
 生 年 月 日 1923 年 4 月 15 日生
  現 住 所
경기도 광주군 오포읍 신현리 1차 681-3
현대모닝사이드 1차 206동 902호
☏ (031) 726-2558

光州師範附屬國民學校를 卒業하고 光州師範尋常科에 入學 1年을 修了 後 高檢에 合格하여 高等學校(舊制)와 大學에 進學하였습니다.

日軍에 入學했다가 解放 後 1946年 2月 學窓 復歸하여 京城大學法文學部와 서울大學校文理科大學에서 修學中 陸軍士官學校에 入校하여 第1期를 優等으로 卒業하였읍니다.
그後 東國大學校文理科大學을 卒業하고 慶熙大學校 大學院에서 國際政治學으로 法學博士學位를 取得하였읍니다.

  1952 - 1953 9師團長, 陸軍人事局長, 6師團長
  1954 - 1956 野戰軍參謀長, 步兵學校長
  1957 - 1959 陸軍情報參謀副長, 聯合參謀本部長
  1959 - 1961 國防部 次官補, 停戰委 韓國首席代表
  1962 - 1987 慶熙大學校 政治學 敎授, 大學院長, 副總長
  1987 - 現在 慶熙大學校 名譽敎授
  1987 - 現在 社團法人 平和硏究院長, 平和討論會 共同代表
  1995 - 1997 陸軍士官學校總同窓會 初代會長
  1997 陸軍士官學校總同窓會 名譽會長
  1999
陸軍士官學校總同窓會 顧問(現)

◆ 賞 勳
 
太極武功勳章, 乙支武功勳章(4), 忠武武功勳章(4), 花郞武功勳章(3) 등
12個의 武功勳章
國民勳章과 報國勳章
美國 銀星武功勳章, 銅星武功勳章, 功勞勳章(2) 總 18個로 韓國軍에서 가장 많은 武功勳章 受勳者입니다.

◆ 主要 著書 및 論文
 
著書 :『韓國戰爭과 南勞黨戰略』『The Korean War』『韓國動亂』『東北亞와南北韓』共著 論文 : "東北亞의 平和構造硏究"外 90余篇
最近의 著書 "平和體制 構築을 위한 提案"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