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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광장

자랑스런 육사인상-2006이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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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이대용 채명신
이대용 동문 공적
 

◆ 춘천지구전투 공적사항

1. 1950년 6월 25일의 38선 전 전선에서 유일하게 방어에 성공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북한공산군은 38선 전 전선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 이를 돌파하고 노도와 같이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춘천지구 38선에는 제7연대 제2대대와 제3대대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모두 돌파당했다.

춘천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제7연대 제1대대는 긴급 출동하여 소양강을 건너 춘천북방 우두산에서 북으로 뻗어있는 164고지 및 그 북방 능선에 배치되어 춘천으로 전진하는 적군을 저지시키고 일보도 후퇴없이 6월 25일의 낮과 밤을 보냈다. 이 방어진지의 제일 북쪽에 위치한 중대는 제1중대였으며, 제1중대장은 이대용중위였다.
그러나, 제1대대 방어진지에서 서쪽으로 약1km 떨어져 있는 5번도로(춘천-화천)상에 있는 옥산포 일대는 북한공산군이 점령하고 춘천시내로 막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5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해 내려오는 부대는 북한공산군 제2사단이며, 옥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병력은 그 선보인 2개 보병대대(증강) 병력이었다.
1950년 6월 26일 아침이 되자, 옥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병력은 그 선봉인 2개 보병대대(증강) 병력이었다.
1950년 6월26일 아침이 되자, 옥산포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 북한공산군에 대하여 우리 제7연대 제1대대는 동쪽(적군의 측방)으로부터 질풍과 같이 구보로 뛰어 내려가서 옥산포 및 그 남쪽의 북한공산군을 아수라와 같이 좌충우돌 하면서 무찔러 이들을 북방으로 4~5km 후퇴시켰다. 북한공산군은 너무도 다급해서 자기들 스스로 옥산포에서 SU자주포 하나를 파괴하고 SU자주포 4대는 옥산포에 내버려 둔 채 북방으로 도주해 버렸다.
옥산포 북방 약 3km북방고지에 와서 북한공산군의 춘천 점령을 독전하고 있던 북한공산군의 춘천 점령을 독전하고 있던 북한공산군 제2군단장 김광협소장은 우리 제7연대 제1대대의 불 같은 역습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38선 북쪽으로 도주해 버렸다. 북한공산군 제2군단장 김광협소장은 이 옥산포전투의 패전 때문에 1950년 7월 3일 군단장직에서 해임됨과 동시에 북한공산군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좌로 강등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대용중위는 제1대대 공격제대의 제일북방에서 제1중대를 이끌고 용전분투했다.
그 후 상급사령부의 작전명령에 따라 춘천시 후평동(봉의산 등쪽능선), 석사동 금병산 등으로 이동하면서 3일간을 춘천시에서 방어하며 버티다가 상급사령부명령에 의하여 춘천시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6.25전사(戰史)상 38선 일대에서 유일하게 방어를 성공시킨 전투는 춘천전투뿐이었다. 춘천지구전투에 투입된 북한공산군은 아군의 4배이며, 화력도 북한공산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이 춘천지구전투에서 북한공산군 제2군단에게 병력, 장비에 대한 상당한 피해를 주고 3일간이나 춘천에서 진격을 저지시킴으로서, 북한군 제2군단이 6월 25일 낮에 춘천을 함락시키고 전격적인 빠른 기동으로 여주-이천-수원 선으로 진출하여 차단선을 설치한 후 한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오는 한국군 패잔병력을 모조리 섬멸시키겠다는 북한공산군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이 생겨, 서부전선의 분산된 한국군 대 병력의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했다는 군사전문가들의 평가가 전후에 정착되어있다.
이대용 중위는 이 춘천지구 전투에서 상부에서 하달하는 명령을 제7연대 제1중대장으로서 아주 지극히 우수하게 완벽하게 수행했다. 그리하여 춘천지구 전투의 공세적 방어의 주역활동을 했다.

2. 춘천지구전투 전과

한국전쟁전투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발행)의 279페이지에서 전재)
[주]: 제7연대 또는 제7연대 각 중대의 전과는 표시된 것이 없으며, 제6사단의 종합전과는 다음과 같다.

<종합전과> 제6사단(1950.6.25~28)
사살및부상 포로 전차 및
자주포
장갑차 45mm
대전차포
싸이드카 박격포 기관총
6.530 122 18 2 2 3 8 15
* 탄약 및 소총은 제외하였다.

<아군손실>
전사 부상 실종 57mm
대전차포
81mm
박격포
60mm
박격포
2.36인치
로켓포
경기
관총
중기
관총
12/192 27/226 1,299 1 5 11 30 8 7
* (1)장교/사병 (2)실종은 대부분 복귀하였다. (3)소총은 제외하였다.

◆ 초산지구전투 공적 사항

1. 압록강변 점령 및 국경경비
1950年 10月 24日 국군 최선봉인 제7연대 제1대대는 강계로의 진격을 중단하고, 서북진(西北進)하여 초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연대장 임부택 대령으로부터 받았다. 제7연대 제1대대는 극성령을 넘고 회목동-양강-고장을 거쳐서 공산군 패잔병을 추격하여 초산 남방 약6키로 지점에서 북한공산군 제8사단장 오백용소장의 예하부대가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완강히 저항하는 것을 돌파하고 이대용 대위가 지휘하는 제1중대를 선두로 하여 초산을 거쳐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선두중대인 제1중대가 압록강변 신도장 마을에 도착한 것을 1950年 10月 26日 오후2시 15분이었다. 뒤따라 제1대대 잔여병력이 모두 압록강에 도착했다. 약2시간 압록강변에 머물던 제7연대 제1대대장은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착한 제1중대만이 압록강변에 머물면서 국경경비 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제2중대, 제3중대, 제4중대, 배속된 대전차포2문, 배속된 헌병분대를 이끌고 압록강 남쪽 약6키로미터 지점에 있는 초산읍으로 이동했다.
중국을 강 건너로 바라보며 국경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압록강변에 배치된 유일한 국경 경비중대인 제7연대 제1중대를,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안내를 받으며 방문한 것은 1950年 10月 27日 정오가 채 못돼서 였다.
연대장은 사진사를 대동하고 왔으며 중국을 배경으로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제1중대장은 함께 사진을 몇장 찍었다. 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압록강변 신도장에서 약100키로미터 남쪽에 있는 온정(溫情)일대에서 중공군과 우리 국군 제2연대가 교전중인데 상황이 국군 제2연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온정 일대에서 우리 국군 제2연대가 패배하면 우리 제7연대는 육상보급로 및 연락로가 차단되게 된다.
온정 일대의 전투상황은 예상외로 급속도로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제6사단 사령부는 국경지대에 전개되어 있는 제7연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압록강변에서 국경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제7연대 제1중대에게 국경경비 53시간만인 1950年 10月 28日 저녁6시 45분 압록강에서 철수하여 초산읍으로 집결하라는 상부명령이 하달됐다. 제1중대는 상부명령대로 초산읍으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10月 28日 밤을 보냈다.
제7연대 제1대대는 10月 29日 새벽, 초산읍에서 제7연대 본부가 있는 고장(古場)을 향하여 철수를 개시, 제1대대의 제일 뒤에서 후위첨병중대 임무를 수행하면서 남으로 이동하던 제1중대가 고장에 도착한 것은 10月 29日 아침해가 뜬 후였다.

2. 중공군 포위망 돌파전투(1950年 10月 29日~11月 9日):
가. 풍장(豊場)지구 전투(1950年 10月 29日~10月 30日):
중공군은 국군 제7연대의 퇴로를 고장 남쪽 풍장일대에서 차단하고 있었으며 제7연대는 중공군 포위망을 돌파하고 남진(南進)하기 위해 1950年 10月 29日 아침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낮에는 국군 제7연대가 중공군을 약12키로미터 남쪽으 로 밀고 나갔으며 밤이 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제일 남쪽에서 전투 하던 제2대대와 제3대대가 밤 자정이 좀 넘어서 무너져서 분산되어 북으로 북으로 후퇴하였다.
이어서 제1대대 제2중대와 제3중대도 무너져서 북으로 후퇴하였다. 이렇게 되니 제7연대 제일 뒤(북쪽)에 있던 제1중대는 북으로 북으로 흩어져 후퇴한 연대 주력이 재편성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하여 유일한 방어 중대로서 몰려오는 중공군을 막아내야 했다.
이대용 대위 지휘하의 제1중대는 사력을 다하여 정면의 중공군 공격 을 새벽 3시반경까지 막아냈다. 그러나 이대용 대위가 지휘하는 제1 중대 정면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제1중대 후방(북방)으로 진격한 듯한 중공군과 이미 제1중대 후방 2키로-12키로미터 일대에 매복해 있던 것으로 판단되는 중공군 대 병력은 콩 볶는 듯한 총성을 울리면서 그 곳으로 후퇴한 국군 제7연대의 재편성 기회를 주지 않고 철두철미 집 요한 추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국군 제7연대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지휘계통이 마비되었으며 무 전병들이 전사했는지 포로가 되었는지 대대지휘부도 연대지휘부도 무 전연락이 두절되었다. 제1중대가 방어진지를 그 이상 사수하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나. 중공군 포위망 돌파전투(1950年 10月 30日~11月 9日):
많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내고 광범위하게 흩어진 국군 제7연대 장병 들은 적유령산맥과 강남산맥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국군 제7연대 각 중대는 각 중대장 독립 지휘 하에 중대별로 뭉쳐서 중공군 포위망 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이르렀다. 중공군은 산속으로까지 집요하게 추격해 따라오고 있었다. 이 때 국군 제7연대는 중공군 제 38군 예하 3개사단과 제40군 예하 3개 사단이 에워싸고 있는 포위망 속에 한복판에 완전히 고립되어 빠져있는 형국이 되었다.
국군 제7연대 장병들이 중공군의 종심깊은 이 대규모 포위망을 돌파 하고 아군이 있는 곳까지 나가려면은 개천-맹산 선까지 걸어나가야 했다.
그 거리는 공중직선 거리로 약 100키로미터이며 도로를 따라 걸어간 다면 150키로미터도 더 넘을 것이나 도로에는 중공군과 북한 내무서 원들의 왕래가 심하여 아군의 이용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천상 태산준령을 넘고 강을 건너고 해야 한다. 또 산속에서도 중공군을 만나면 교전하고 이를 뚫던가, 아니면 이를 피해서 멀리 돌 아가야 한다.
따라서 국군 제7연대 장병들이 걸어야 할 행군거리는 300키로미터가 될 수도 있고 500키로미터가 될 수도 있고 또 그 이상도 될 수도 있 다.
홀로 남아서 중공군의 정면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제1중대는 1950 年 10月 30日 새벽 3시반경, 방어진지에서 철수하여 중대장 이대용대 위 지휘하에 낭림산맥의 지맥인 적유령산맥의 승적산(해발 1994미터) 쪽을 향하여 북동방향으로 급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늦게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가 는 돌파작전에 들어갔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중공군은 포위망을 거미 줄같이 겹겹이 잘 쳐 놓았다.
이대용대위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그 포위망속에서 중공군 을 만난 것은 22회였고 이중 9회는 높은산 우거진 나무숲속에서 또는 밤에 야음을 이용하여 이들 적군을 피해서 우회하던가 아니면 깊은 밤에 그들의 배치지역을 그물을 빠져 나오듯이 살그머니 새서 빠져 나오는 작전을 구사했다.
중공군과 맞닥뜨린 22회중, 13회는 부득히 대담하게 크고 작은 과감 한 전투를 하여 상호간에 많은 인원손실을 입었다. 아군 전사자가 나 면 그 시체에서 실탄을 긴급히 회수하여 실탄보충을 했다. 13회의 전 투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은 11月 3日 오후에 북신현 서북쪽산 청천강 도하지점에서 있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제1중대는 결정적 타격을 받았으나 중공군을 뚫고 묘향산맥에 올라갈 수가 있었다. 묘향산속에 서 어떤 부하는 중공군포위망을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으니 총칼을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피난민 행세를 하여 남으로 나가자 는 의견을 제시했다. 중대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군인은 자유조국을 위하여 끝끝내 군복을 입고 총칼을 들고 적군과 싸우다가 명예스럽게 전사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군복을 벗고 총칼을 버리고 살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설득시켰다.
가지가지의 어려움 속에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으며 남진하던 이대용 대위 지휘하의 제1중대는 1950年 11月 7日 새벽, 대동강 상류인 비 류강을 나룻배로 건너 수하리를 경유 오후 2시경에 중공군 남진을 선 도하는 북한공산군 1개 중대와 평안남도 덕천군 성양면 남중리에서 포위망 속에서의 최후의 전투를 하고 이를 뚫고 오후 4시반경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와 만나 중공군 포위망 속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리하여 이대용 대위가 지휘하는 제7연대 제1중대는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 사력을 다하여 중공군과 9일간 전투하면서 국군 제7연대 장병 들 중에서 제일 먼저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
국군 제7연대 장병들의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의 희생은 엄청났다. 부 연대장 최영수 중령,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 제3대대장 조한섭 소령 은 포로가 되고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군복 에 무장을 한 채 지휘부 요원들을 지휘하면서 어렵게 살아 나왔다. 이 두 지휘관은 훗날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국군 제7연대의 장병들은 포위망 속에서 보 통 2주일 내지 3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3개월이나 적 포위망 속에 갇 혀 있다가 살아나온 인성훈 소령 같은 장교도 있었다.
제7연대 예하 소총 및 중화기 중대장 12명중에서 살아나온 중대장 수는 반을 약간 넘었으나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 중대를 끝까지 지휘 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중대장은 12명의 중대장 중에서 오직 한사람인 제1중대장 이대용 뿐이었다. 나머지 살아서 나온 중대장들은 포위망속에서 허덕이다가 중대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각자 개별 독자 행동을 취했으며 이들 중 2명만은 군복을 입고 총을 둘러맨 채 살아 나왔고 나머지는 모두 군복을 벗어 버리고 민간인 복자으로 갈아입고 총을 버리고 민간 피난민 행세를 하면서 살아나온 중대장들이었다.
새로 부임해 온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1950年 11月 9日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 용전 분투를 하여 이를 뚫고 생존해 나온 유일한 중대 인 제7연대 제1중대 장병들을 사단 사령부에 불러 특별신고를 받고 군악대 연주하에 성대한 환영과 위로를 해주었으며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 이하 중대 장병들의 용전분투를 극찬해 주었다.

◆ 초산지구전투 공적 사항

1. 재월한국인 철수 및 안전확보

북월군이 파리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북위17도선을 넘어 남침 총공세를 취하자 베트남공화국(남월)은 패망위기를 맞이했다.
주월한국대사관은 우리정부의 지시에 따라 1975년 3월말, 재월한국인 철수본부를 설치하고 육군현역준장이며, 주월한국대사관에 파견되어 경제협조실장(경제공사)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이대용을 재월한국인 철수본부장에 임명했다.
당시 재월한국인수는 외교관 21명, 외교관가족 59명, 농업사절단 20명, 의료사절단 21명, 수자원사절단 4명, 그리고 순수 민간인 1009명이었다.
재월한국인 철수 계획에 따라 1975년 4월 26일까지에 재월한국인 총수의 약 80% 인원을 철수시키고 약 200명이 남아있었다. 이들 잔류 민간인 대부분은 개인재산처리가 잘 안되어 쉽게 떠나지 못하고 동분서주하면서 각종 부동산의 재산처리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었다.
한국대사관 가족전원은 이미 철수가 끝났고, 21명의 한국외교관중 8명은 철수를 끝내고, 13명이 남아있었으나 미국측과의 합의에 따라 이들 13명은 미국대사관책임하에 미군 헬리콥터로 철수하겠금 되어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키신져는 소련외무장관을 중간에 내세워 북월정부측과 비밀교섭을 해서 사이공에 투입된 미군이 미국민간인과 미국대사관직원들의 철수작전을 완료할 때까지는 사이공외곽에 있는 북월공산군이 절대로 사이공시내에 진격해 들어가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아놓고 있어, 미국측은 상당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헬리콥터에 의한 사이공으로부터의 미국인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이 미국측이 한국대사관직원 전원을 철수 시키겠금 한-미 합의가 이루워져서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마지막철수 및 잔여 한국민간인 철수도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1975년 4월 29일밤, 재월미국인철수의 총책임자인 주월미국 마틴대사는 '지금 북월공산군 대부대는 사이공시내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그 선두는 주월미국 대사관 수백미터 거리에 진격해 왔다.' 라는 사실무근의 잘못된 첩보를 접하고 철수작전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1975년 4월 29일 밤 20시 50분, 이대용한국인철수본부장은 마틴대사를 보좌하고 있는 베넽공사를 만나서 주월미국대사관 별관마당에 집결하고 있는 한국외교관 11명을 포함한 약180명의 한국인들을 수시로 날아오고 있는 헬리콥터에 조속히 태워 철수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넽공사는 상황이 위급하니 이대용철수본부장만 자기가 지명한 미국대사관직원의 경호안내를 받으며, 지금 당장 대사관 옥상의 헬리콥터장으로 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라고 했다. 한국인 전원의 철수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대용철수본부장은 이를 거부했다. 철수본부장이 부하직원과 한국민간인들을 생사의 갈림길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살려고 도망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어쨌던 한국인 모두를 철수시키겠금 어떤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측이 한국인들을 철수 못 시키고 철수작전을 중단한다면 한국인들이 살아남을 길은 오직 하나 주월(사이공)프랑스대사관이나, 주월영국대사관에 긴급교섭을 해서 그들 대사관안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었다. 프랑스나 영국은 북월하노이에도 대사관을 설치하고 있어 남월, 북월 모두에게 대산관이 있는 상태임으로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나 영국대사관도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북월공산궁이 절대로 침입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이대용철수본부장은 외교관공사의 높은 직함이 있고 프랑스대사관이나 영국대사관고위층과 개인친분관계가 두터움으로 적극 노력하면, 그 교섭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며 그것을 위해 전심전력을 기우릴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30분경, 미국측은 한국인, 독일인, 기타 여러나라 국민들을 버리고, 철수작전을 중단하고 떠났다.
이대용철수본부장은 대사관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어둠속에서 한국인들을 집합시키고, 상황설명을 긴급히 하고 대사관참사관, 1등서기관등을 대동하고, 이리저리 달려가 교섭 끝에 드디어, 교섭이 성공되어 잔류학국인 160여명을 치외법권지역인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대피시켜 안전을 확보하고 이날 정오에 북월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사이공에 쳐 들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행할 때 한국인은 한명도 피해없이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2. 외국외교관앞에서의 의연한 사생관

1975년 5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주월일본대사관 와타나베참사관은 우리나라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이대용철수본부장 앞으로 보내온 전문을 가지고, 프랑스대사관 병원에 있는 이대용철수본부장을 찾아왔다. 전날 일본대사관 통신망을 통해서 이대용철수본부장이 보낸 전문에 대한 본국정부의 응답전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와타나베참사관은,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의 고위인사들은 점령군과 함께 이미 사이공에 들어와 있으며, 북월 공산 정권 및 프랑스대사관과 교섭을 벌이고 있는 중이며, 곧 북한정권인사들이 이곳으로 와서 이대용철수본부장을 위시한 9명의 한국외교관을 데리고 북한으로 가게 될 것이니, 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이라고 했다. 후진공산국들은 국제법을 어기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이대용철수본부장은 초긴장을 했다. 군인된 몸으로서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사생관, 언젠가는 필연코 가야 할 죽음의 길, 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가야한다. 깨끗하게 가야한다. 이장군은 권총을 꺼냈다. 대한민국 육군장군에게 지급한 38구경 5연발 리벌바 권총이다. 실탄5발이 장전되어 있다. "와타나베씨 고맙습니다. 나는 북한에 불법으로 강제로 끌려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 보다는 확고한 국가관, 사생관에 입각해서 자결할 결심입니다. 북한공산요원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이곳에 나타나면은 그들을 쏴 죽이고 나머지 한발로 자결할 것입니다."
초긴장상태에서 생사를 초월한 이 장군의 안색은 너무도 진지했다. 와타나베참사관은 이장군의 손을 잡고 자결할 생각을 말아 달하고 하며 울었다. 옆에 있던 이규수참사관도 울고 있었고, 서병호 영사도 울고 신상범서기관도 울고 있었다. "확고한 이 나의 결심을 아무도 변경 시킬 수 없습니다. 어서 돌아가 주십시요. 와타나베씨"
한참동안 눈물로 만류하던 와타나베참사관은 돌아갔다.
그런데 무슨이유에서일까. 북한공상정권 요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3. 사이공 치화형무소에서의 항거투쟁

베트남공산정권 외무부는, 사이공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외교관들에게 '1975년 6월 18일 오전 10시 사이공 탄산눝공항에 나가서 태국방콕으로 가는 국제 적십자사 수송기를 타고 출국하라'는 통보를 한국외교관들에게 보내왔다.
한국외교관들은 국제적십자사 사이공지사장의 인솔하에 사이공 탄산눝공항에 제시간에 나갔으나, 수송기에 탑승하려는 직전에 권총을 찬 베트남관리들이 나타나서, '남조선인들의 출국을 보류한다'고 해서 한국외교관들은 출국하지 못하고 다시 시내숙소로 되돌아 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에 초긴장이 감도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 10월 3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安寧內政, 보위부)은 이대용장군을 불법체포하여 악명높은 기요틴(단두대)까지 있는 사이공 치화형무소에 투옥, 수감했다.
이대용장군을 체포할 때, 베트남공산정권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한국말로 읽어내린 베트남관리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과대학을 졸업한 즈엉 징 특(DUONG CHINHTHUC, ?)이었으며, 그는 이대용장군앞에서 "성명 이대용, 직업 외교관, 베트남혁명사업을 방해했기에 체포함. 1975년 10월 3일" 그리고 구속영장에 서명한 베트남공산관리의 직책과 이름을 읽었다.
이대용장군이 수감된 감방은 사형수나 장기수를 수감하는 격리감방이었다. 햇빛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열악한 감방이며, 방안에는 뻥 뚤려진 지저분한 악취가 진동하는 변소가 있을 뿐, 사방은 두터운 콘크리트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끼이며, 점심식사는 없었다. 한끼의 식사는 밥 한컵정도이고 반찬은 호박소금국 또는 라믄(베트남야채)소금국 한가지 뿐이며, 한끼의 부식은 한 컵 정도였다.
이 열악한 급식 및 감방생활은 북한이나 소련의 정치수용소의 급식 및 감방생활을 연상케 했다.
1975년 10월 10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요원들은 치화형무소로 와서 이대용장군을 신문했다. 한국말 통역은 체포당시의 통역인 즈엉징특(DUONG CHINHTHUC: 2004년 8월 현재, 그는 주한국베트남대사관 특명전권대사임)이가 했다.
안닝노이찡요원은 한국에 대해 원한이 사무치는 것인지 또는 이장군의 기를 꺾어버리려는 속셈인지, 언성을 매우 높이며, 남조선 박정희 집단은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베트남 침략군으로 보내 수많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여 천인공노 할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길게 하고 "그대(이장군)는 총살형에 해당한다"고 큰소리로 외친 후 "그러나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고 진보적민주주의(공산주의)편에 가담해서 인민들을 위해서 일 하겠다면 과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대용장군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했다.
"나는 유엔이 제정한 비엔나협정에 의하여 외교관면책특권이 있으며, 따라서 베트남정부는 나를 신문할 권한이 없고, 나는 답변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고 "정치에 있어 이 지구상에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교전당사국이라도 외교관은 체포할 수 없으며, 국제법에 따라 모두 서로 본국으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국제법에 규정한 대로 유엔의 보호를 받는 이장군은 결코 베트남관리들의 신문에 응하지 않겠다고 확고한 발언을 거듭 강조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요원은 "어쨌던 그대는 총살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이대용장군은 "총살, 총살하는데 할 테면 하라. 그 따윈 협박에 두려워 할 내가 아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러나 총살하려면 유엔이 주동이 되어 국제규모재판소를 설치하여 국제재판을 한 후에 총살하여야 한다. 베트남 정부는 국제외교관인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안닝노이찡요원과 이대용장군은 평행선을 그으며, 언쟁만 벌이다가 국제법상 정당한 주장인데다가, 또 이미 나라 위해 죽을 각오가 확고히 되어있는 의연한 정신자세의 이대용장군의 주장에 대항할 이론적 밑천을 잃은 안닝노이찡요원은 하는 수 없이 "오늘의 신문은 이것으로 끝내겠소. 곧 2차 신문을 하러 오겠소"하고 제 1차 신문을 끝내버렸다.
한국정부는 이대용장군이 베트남공산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디서 어떤 일을 이장군이 당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거운 안닝노이찡의 압박이 이장군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안닝노이찡은 이 장군에게 일광욕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열악한 식사로 인해서 영양실조와 햇빛을 전혀 못 보는 상태에서 갖가지 병이 생겼다.
약10개월간 단 1초도 햇볕을 못보고 좁은 격리감방에 가둬놓으니 미칠것만 같았다. 안닝노이찡은 이러저러한 갖가지 수단방법을 써서 이장군을 굴복시켜 사상적 전향을 시키려고 애썼으나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이장군이 형무소측에 계속 항의했더니 실로 297일만인 1976년 7월 27일에야 일광욕을 15분간 시켜주었다.
영양실조로 체중은 자꾸 줄어서 약 1년만에 이장군의 체포당시의 체중 78kg는 46kg으로까지 내려갔다.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살의 유혹이 수없이 찾아왔으나 "자살은 의자가 박약한 자의 행위다. 끝까지 투쟁하여야 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버텨나갔다.
한국정부와의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사이공시내에 있는 교민과도 서로 소식을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하게 베트남 안닝노이찡과 투쟁하고 있는 이장군에게 수감되어 1년 9일이 되는 1976년 10월 12일 깜짝 놀랄 기적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정부에서 백방수단을 강구하며 1년간 애써온 결과, 치화형무소 간수가 우리편을 들어 사이공에 있는 우리교민회장의 편지조각을 이장군에게 가져온 것이다. 극비로 이 쪽지를 보내니 이장군의 건강상태, 북한요원으로부터 신문 받았는지의 여부, 특히 보안에 유의하면서 답신을 써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이 비밀루트를 통해서 이장군은 어렵사리 가끔 한국외무부장관, 그리고 가족 또 때에 따라서는 한국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보내는 편지라서 그 횟수는 아주 적었다.
이 극비 통신루트로 인해서 우리 정부는 이장군의 1년간의 필사적인 확고한 투쟁정신과 태산 같은 부동의 사생관, 국가관, 군인관, 애국심을 모두 파악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장군을 구출하라고 정부해당 각 부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77년 2월 음력 명절 때 치화형무소에서는 모든 수감자들에 대한 가족, 친지 면회가 특별히 허용되었다. 외국인 수감자들에 대한 면회는 그 나라 교민회원들이 하도록 허용되었다.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약 5,000명의 수감자들은 모두 형무소 광장에 모여서 즐거운 약 2시간의 면회를 하며 가족, 친지들이 들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각가지 차입품을 들고 형무소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유독 공산당에게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 이대용장군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1977년 9월 3일 베트남 국경일에도 치화형무소 수감자 전원에게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이대용장군과 수일 후에 총살집행되는 와하우교 반공청년장교 5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해마다 음력 명절과 국경일에는 치화형무소 수감자 전원에 대한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있었으나 이대용장군 한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대용 장군이 안닝노이찡이 강요하는 소위 인민(공산주의자)편으로의 전향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이장군이 그들의 압박에 지치고 지쳐 굴복할 때까지 심적 고통을 끈질기게 가하는 수단의 하나로 면회금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장군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한번도 면회를 못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옥사(獄死)하던가 아니면 반송장이 되어 출옥하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훗날의 일이지만 이장군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4년 7개월동안 단 한번도 면회를 해보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병에 걸린 몸으로 옥문(獄門)을 나서게 된다.
옥중(獄中)에서 '어떠한 칠난팔고의 험난한 가시밭 길이라도 의연하게 극복하리라'는 철석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장군이지만은 정신력과는 달리 신체는 자꾸만 허약해지고 있었다.
1977년 6월 21일부터는 머리가 뜨끔거리면서 잠을 못 이루는 몹쓸병을 앓기 시작했다. 6월 24일 밤에는 거의 한잠도 못 이루고 꼬박 새우다가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고 이를 악물고 애를 썼으나 견디기 어렵게 몸이 쑤셨다. 6월 26일 오후부터는 40도의 고열이 온몸을 쑤시게 하며 감방의 천정이 거꾸로 되었다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빙글빙글 도는 환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3일간 식사는 손도 못 대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6월 27일 형무소 당국도 거적대기 위에 누워서 펄펄 끓는 이장군의 실신상태의 몸을 보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형무소 본부에서 간부들이 몰려오고, 2명이 밤을 세워가면서 이장군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6월 28일 오후에는 간수들이 여의사와 여간호원을 데리고 감방안으로 와서 왕진을 하고 갔다. 그리고 병원에 돌아가서 여의사는 알약을 20여알 보내왔다. 7월 1일이되면서 고열은 가시고 미열만 계속되었다. 7월 4일이 되어서야 이장군은 제대로 일어나 식사를 겨우 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장군은 일어나서 런닝셔츠와 팬티를 갈아입으려고 벗었더니 많은 피가 끔직하게 뒷부분에 묻어있었다. 살펴보니 이장군이 모르는 사이에 둔부양쪽과 허리 뒷편에 각각 손바닥 크기의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에 피가 엉켜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을 1주일간 계속 앓으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고열에 신음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하며 조잡한 콘크리트 방바닥에 얄팍한 거적대기와 담요 한 장을 깐 채 고통을 이겨내려고 이리저리 몸부림치다가 그렇게 된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큰 상처였다.
이런 가운데 이장군은 가지각색의 잔병에 시달리면서 치화형무소의 암흑터널 옥고(獄苦)의 세월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은 계속해서 별의별 수단방법을 다 써가며 이대용장군을 회유, 공갈, 협박했으나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장군이 수감되어 약 3년이 된 1978년 9월 25일 드디어 북한노동당 제3호청사통일선전부에 속해 있는 중견간부중 빼어난 일꾼인 궁상현, 박영수(훗날 서울불바다 발언한자), 한경수의 3명이 이장군을 신문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베트남으로 왔다. 그들 3명중 2명이 7일간에 걸쳐 이장군을 직접심문했다. 그들은 민족, 혈연, 남북대화 문제들을 들고나와 이장군을 회유도 하고 공갈, 협박도 하면서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들은 이장군이 사상적 전향을 하고,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망명서(自意亡命書)를 쓰게 한 후 평양으로 이장군을 납치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국제법에 의해서 외교관은 체포나 구금을 시킬 수는 없으나, 외교관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국제법이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장군이 북한에 끝내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극비리에 사상전향서를 이장군으로부터 받아, 처자가 있는 서울에 보내주긴 하지만 북한의 극비 거물간첩으로 극비지령을 내려 이장군의 북한비밀간첩으로서 서울에 묻어둔다는 차선안(次善案)을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궁상현일행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이장군을 밀어 넣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헛일이었다.
이장군은 안닌노이찡에 맞서 싸울 때와 똑같은 이론으로 외교관면책특권을 내세워 북한요원들이 국제외교관을 신문할 권리나 자격이 티끌만치도 없고 국제외교관인 이대용장군은 그들의 심문에 답변할 의무가 전혀 없으니, 한마디로 답변하지 않겠다면서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욕지거리를 하면, 이장군은 이에 맞서 동등한 욕지거리로 대했다.
하루는 궁상형이 "이새끼"하며 이장군을 때리려고 상의를 벗으며 일어나자 이장군은 "야, 이새끼야, 때릴테면 때려봐라" 더 큰소리치며 일어서서 그자를 태권도로 때려눕힐 자세를 취했다. 나라 위해 이미 죽음을 완벽하게 각오한 이대용장군은 태권도유단자이며, 무서운 것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궁상현은 덤벼들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자가 말려서 이장군은 격투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심문은 헛돌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투로 미루어 그들은 이장군이 '자의망명서'를 써서 국제신문기자들에게 공표하고 이장군이 북한으로 망명 귀순하도록 공작하는 것이 아주 명확히 보였다.
1978년 10월 2일 아침 제6차 신문때 북한 3호청사 선임자인 궁상현은 저주스러운 눈길로 이장군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당신이 여기서는 말을 않고 있지만 어디 두고 봅시다. 다른 곳에 가서는 우리에게 말을 안하고 못 배길거요"하고 협박공갈을 했다.
북월 하노이 같은 곳으로 북송 이감시켜 고문하겠다는 공갈이었다. 이장군은 코웃음을 치며 "흥!"하고 씩 웃어버렸다. 서리 맞은 잡초들은 단숨에 시들어 가지만, 소나무는 서리 맞고 눈보라 쳐도 웅장하게 버텨나간다. 이세상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나무도 있는 것이다.
1978년 10월 2일 오후 2시 제7차 신문이 시작되었다. 이장군은 계속해서 초연하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흰셔츠를 입은 자가 "왜 저렇게 외곬일까? 우리말을 왜 모두 적의(敵意)로만 받아들일까?"하고 체념하듯 말했다.
선임일꾼 궁상현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떠들어 댔다. 이장군은 딴생각을 하며 그자의 말에 정신을 쏟지 않았다. 그자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알갔소? 이세가지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했다.
이장군은 궁상현이가 말한 세가지를 귀다아 듣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궁상현은 갑자기 큰 소리로 "좋소. 묵비는 중립이요. 중립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소. 여지껏 우리가 말한 것을 당신이 모두 시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당신이 북반부 고향에도 한번 가보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끝내겠소. 가시오"하였다. 말도 안되는 궤변이었다.
그냥 나올수가 없었다. 한마디 해야 했다.
"여보시오. 어째서 묵비가 시인이요. 나는 여지껏 당신들이 말한 것을 하나도 시인하지 않고 또 죽어도 북한땅에는 안 가겠소."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로서 북한노동당 3호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있는 궁상현일행에 의한 이장군에 대한 신문은 1978년 9워 25일 사이공 안닝노이찡 안가에서 시작하여 아무런 성과없이 1978년 10월 2일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대한 문제는 북한노동당 3호청사의 높은 간부로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1980년대에 극비리에 귀순한 황일호씨의 증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공산군이 대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 1979년 1월 9일에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이때 북한 김일성은 캄보디아를 지원하고 베트남공산국과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1979년 2월 17일 중공군 대부대가 베트남 국경을 돌파 침공할 때도 북한 김일성은 중공편을 들었다. 이로써 북한 김일성공산정권과 베트남공산 정권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정부는 이대용장군 구출외교 노력에 활기를 더하며 가일층 맹활동을 하였다.
이 결과 이대용장군은 치화형무소에서 1980년 4월 11일 석방되어 4월 12일 우리 정부가 보낸 아이젠버그회장의 전용기를 타고 스웨덴 외무차관 리프랜드를 단장으로 하고, 스웨덴 외무부 비서실장 닐슨과 아이젠버그 그룹의 동경지사이사 겸 하노이 지사장 드웍씨의 안내 및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
이와 같이 이대용장군은 1975년 4월에는 재월한국인 철수본부장으로서 예기치 않았던 위기상황에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한국인 생명을 모두 구하고 베트남 공산정권의 불법체포, 투옥 중에도 확고한 군인관, 공무원관, 사생관, 국가관을 가지고 국가기밀을 보호하며, 국가에 충성한 그 고귀한 정신은 국가 공무원, 또는 현역군인신분을 가진 장병들이 대대손손 만대에 걸쳐 이어 받을 핵심가치이며 이대용장군의 그 큰 공은 천추에 빛날 것임으로 이에 포상을 상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