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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광장

자랑스런 육사인상-2010생도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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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열 홍성태 김동수 생도2기

육사 생도2기 동기회 약사



1. 명칭 :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동기회

2. 회장 : 장 기 호

3. 입교 : 1950년 6월 1일

4. 임관 : 1950년 10월 23일

5. 육사 명예졸업 : 1996년 5월 4일

6. 생도2기생 입교 과정

1949.11월에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4년제 육사교육과정을 설치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육군사관학교생도 모집공고를 49년 11월 26일 자로 동아일보에 게재하니 전국의 고등학교(당시는 6년제 중학교) 졸업 및 졸업 예정자들 이 청운의 뜻을 품고 육사에 응시하였다.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했던 28:1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449명이 선발되어 6월1일 육군사관학교로 가입교했는데, 육군사관학교 자체에서 실시한 소양시험에서 다시 116명이 탈락하고 333명이 남아 육본특명(갑) 152호(단기 4283년 5월29일부)로 정식 입교하였으며, 6.25동란이 발발할 때까지 25일간 제식훈련, M-1소총 사격술 예비훈련 및 영점 조준사격을 완료한 상태였다.

7. 육사 생도 2기생의 참전

6.25일, 적의 기습남침으로 동란이 발발하자 생도1기와 생도 2기생은 육군본부 출동 명령에 따라 전투부대로 편성되었으며, 생도 2기생은 전원 소총수로 포천전투에 투입되었다. 6월 25일 17시, 생도대대는 징발된 민간트럭에 분승하여 퇴계원, 금곡 및 광릉 입구를 거쳐 북상, 부평리에서 하차하여 포천군 내촌면 팔야리에서 의정부 북쪽 도로상의 송우리까지 포진하는 방어진지 편성에 들어갔다. 밤새워 급조한 방어진지는 다음날 10시경 완료되었으며, 26일 16시경 적 3사단 예하 제9연대 주력이 공격해 오면서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최후저지 사격의 개념도 모른채 생도 1기생들의 지도아래 일제 사격을 퍼부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적의 남침을 일단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보유 탄약이 떨어지고, 26일 18시경에는 적의 전차가 출현하는 등 방어진지를 고수하기에는 중과 부적인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명에 의하여 철수와 지연전을 감행하면서 92고지를 포함한 사관학교 지역을 지키는 제2차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또 한번의 대격전을 치루었다. 피아간에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지만, 또다시 생도들은 금곡리 방어전투, 수원 방어전투를 치르면서 수원 외각에서 집결하여 평택까지 철수하였다. 이처럼 개전초 한강 이북에서 적의 남침을 저지, 또는 지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생도 2기생들은 그 후 제3사단에 배속되어 포항 전투에도 참전하였다가 부산 동래로 이동하여, 전시체제하에 창설된 육군종합학교 1기 및 2기로 편입되었다. 휴교령과 더불어 육군사관학교가 폐교된 상황에서 갈 곳을 잃은 생도 2기들은 전선의 위기상황과 함께 초급장교의 조기 충원이 요구됨에 따라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 속성 장교교육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생도 2기생 주력은 육군종합학교의 제1기부터 3기까지로 임관하고 낙오된 생도는 서울수복 후에 육군종합학교로 자진 복귀하여 제9,11,15,18 및 19기로 임관하는 등 사연도 많았다. 사관생도 신분으로 산화한 86명은 국방부의 추서 임관 배려로 국립 묘지 영안실에 위폐만 안치되었다. 육군종합학교 기수로 편입되어 1950년 10월 23일 보병, 포병 및 공병 등 전투병과로 분류되어 육군소위로 임관된 생도 2기생은 대부분 전시증강계획의 일환으로 창설된 보병 제9사단으로 보직되어 소대장, 소부대 참모, 중대장의 직책을 부여 받아 6.25 동란 전 기간 동안을 참전하였고 휴전 후 예편하기까지 조국 사수에 신명을 바쳤다. 국가의 간성인 사관생도를 입교 25일 만에, 그것도 군사훈련과 교육을 통해 합당한 자질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최전선에 소총수로 투입한 것은 세계 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동기생들은 당국이 구국의 위급한 상황에서 취한 긴급조치임을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조국 사수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자랑스 럽게 생각하고 있다.

8. 생도 2기생의 복교 문제

육사 생도 2기생들이 임관하여 이미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던 1951년에 전선이 교착 국면에 들어서자 육군본부에서는 육군사관학교의 재개교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육군사관학교 폐교 및 생도 1,2기생의 전선 투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육사 재건과 동시에 생도 2기생의 육사 복교를 지시한 것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이었다. 작전국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육군 교육과장은 생도 2기생의 주류가 9사단에 재직 중임을 확인하고 공문을 하달하기에 이르렀다. 1951년 9사단에 하달된 공문은 다음과 같다. 수신: 보병 제9사단장 발신: 참모총장 명에 의하여 작전국장 준장 이용문 제목: 육사 재개교에 다른 생도 2기생 소재 파악 1. 육군사관학교 재개교를 앞두고 생도2기생 소재를 파악하고저 함. 2. 귀 사단에 배속된 육사 생도 2기생의 소재를 파악하고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 할 것. 3. 생도 2기생이 복교 후 발생할 문제점을 도출하고 그 대안을 건의할 것. 이 공문을 접수한 9사단에서는 다음날 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토의했 으나 복교문제는 무산되었다. 그 이유는 1. 현직 중위를 사관생도 신분으로 끌어 내리는 것은 세계 역사에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고 2. 술 담배 등 이미 세상 풍속을 맛본 장교들을 재교육시킬 경우 통제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엄격한 규율의 육사 전통수립에 지장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생도 2기생들은 이런 불행 속에서도 부여된 임무를 말없이 완수하고 있었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9사단에 근무하던 생도 2기생의 수는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20여명이 전사 또는 부상 했으며 장교 보수과정인 초등군사반에 입교 시기가 되자 하나 둘씩 전속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무렵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군 장교에 대한 유학계획을 발표하였다. 전쟁 중이지만 장차를 위해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시켜 현대적 군사학을 익히게 하겠다는 취지였다. 생도 2기생들은 육사에서 학위 및 임관을 하지 못한 것에 한이 맺혀 있어 어떤 과정이든 경력을 보완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에 부심했고, 도미 유학생 모집이 시작 되자 생도 2기생들은 대거 선발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유학의 길에 오르니 생존 동기생의 절반에 가까운 70여명이 미국 유학을 마치게 되었다. 육군에서도 생도2기를 우수집단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9. 6.1탑 건립

생도 2기생들은 육군종합학교 졸업 기수와는 관계없이 육군사관학교 동기회를 만들어 <6.1동기회>라고 불렀다. 1950년 6월 1일, 한국군 최초의 4년제 육사생도로 입교한 날을 기린 뜻 깊은 명칭 이며, 생도2기 6.1 동기회는 1961년 6월1일 발족하였다. 6.1 동기회가 발족한지 10년 후인 1971년 6월1일에 육사 군사과학대학원 광장(옛 생도 제1연대 지역)에 6.1탑이 세워졌다. 6.1탑은 생도 2기생들이 첫 4년제 육사 생도로 청운의 뜻을 품고 입교하였으나 꿈을 채 피워 보기도 전에 6.25 전쟁이라는 시련과 고난의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없기를 기원 하면서 못다 피운 뜻을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생존한 생도 2기생들의 정성으로 세운 것이다.

10. 가까스로 회복된 명예, 그러나 시간은 많이 걸렸다.

1950년 6월1일 홍안의 청소년들이 부푼 가슴으로 화랑대에 모여 내일의 육군을 이끌 푸른 꿈을 간직하면서 첫 학과를 시작하던 그 터전에 지금은 또 다른 화랑의 후예가 늠름한 모습으로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역사는 이처럼 대를 이어가며 면면히 흐르는 것이다. 그 때 그 333명의 전우들은 불운했던 역사의 격랑과 함께 전사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고 지금은 겨우 1/3 정도만 남았다. 원론적 시각으로 볼 때 인생이란 게 먼저 떠난 사람들이 행복할까? 아니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행복할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더 많은 고초와 시련을 겪었기에 먼저 떠난 사람보다 아픔과 고통은 많았다 해도 여전히 살아있기에 그나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은 먼저 떠난 사람들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생도 2기생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젊은 시절처럼 도전과 집념의 혈기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뭔가 값진 일들을 후대에 남겨야 할 연륜에 도달했다. 생도 2기생들은 매년 6월 1일과 12월중에 하루를 정해 1년에 두 번씩 총회를 가져 왔다. 6월1일은 축제일이고, 12월은 한해를 정리하며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그때면서 뭔가 좋은 일들을 의논하고 먼저 간 전우들을 기린다. 동기생 모두가 민간인이 된 첫 6월1일은 1985년에 맞았다. 이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육사 생도로서 전투 참전하여 전사한 86명의 동기생이 군당국의 무관심속에 아무런 조치없이 내 팽개쳐진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육사에서 생도들이 훈련하다 쓰러져 순직한 경우에도 추서 임관시켜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법이다. 그런데 육사생도 신분으로 포천 부평리 전투에 투입되어 계속되는 전투에서 전사한 동기생들이 그대로 방치되어있다는 사실에 살아남은 생도 2기생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 영혼이 30여년 동안 화랑대와 부평리 일대를 맴돌며 얼마나 조국과 전우들을 원망했을까. 우리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1991년 6월1일 육사 생도2기 동기회에서는 동기생 전원의 결의를 거쳐 전사 동기생 추서 임관을 국방장관에게 건의하고, 1992년 5월에는 전사한 동기생의 추서 임관과 함께 국립묘지에 위폐 봉안을 건의하였다. 이같은 건의는 육군 전사망 심의위원회에 이첩되었고, 전시 불가 항력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증빙서류를 작성하는 등의 어려운 작업 끝에 故 육군소위로의 추서 임관이 성사되었고, 국방부는 1992년 10월15일 인사명령 제335호로 추서 임관 및 제적을 하달하면서 국립묘지 위폐 봉안을 정식으로 통보해 왔다. 이로서 우리는 전사한 동기생들에 대한 책무의 일부를 완수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1994년 2월2일 육사 생도2기 동기회장 명의로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육군사관 학교장에게 각각 명예졸업장 수여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육군본부로부터 명예졸업장 수여가 곤란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우리 요구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훈령을 상기시켰다. "전쟁으로 인한 학년과 진급 누락자는 본인 희망에 따라 학년 진급을 인정하고 군 및 각 학교는 복교 학생에게 특별 배려를 하라" 우여 곡절 끝에 1996년 4월 16일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즉, 1996년 5월 4일 육사 개교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육사 생도2기 전원에게 육사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는 결정이었다. 1996년 5월4일 육사개교이래 최대의 행사가 화랑연병장에서 벌어졌다. 축제 분위기 는 명예졸업장 수여 장면에서 한층 고조되었다. 94명의 노병들이 화랑 연병장에 46년 만에 도열하여 졸업장을 받는 장면은 글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휠체어에 몸을 싣고 졸업장을 받는 동기생도 있었다. 많은 애처로움을 연출하면서 명예졸업장 수여식이 끝났다. 육사인이 된 이상 육사에 동기생 일동의 이름이 영원히 남아야 되겠기에 육사 교직원 및 생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교훈탑에서 동판으로 된 동기생 명단 부착식을 성대히 거행함으로서 생도2기 입교자 전원이 화랑대인이자 육사인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11. 참전생도상

노병들이 모였다. 운영위원 30여명이 모여 현안을 토의하는 과정에서 육군사관학교에 육사생도들의 6.25 참전을 기리는 조형물 제작과 설치가 제의되었다. 입교일을 기리는 6.1탑이 이미 현역시절에 제작되어 한쪽 구석에 서 있지만, 정규 육사생도의 참전을 기리는 조형물로서는 부족함이 있다는데 중지가 모아졌다. 그리하여 동기회장 책임 하에 동상건립 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모금과 독지가의 특별지원을 받고 육사 측과 협의하여 육사 도서관 앞에서 2000년 6월 25일 참전생도 상 조형물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12. 총동창회 가입 후의 생도2기 동기회

함께 입교하였다가 육사생도의 신분으로 전사한 동기생들을 故 육군소위로 추서 임관 시키고 그 위폐를 국립 현충원에 봉안함으로서 고인이 된 동기들의 40년 한을 조금 이나마 달랠 수 있었고, 살아남은 동기생들은 명예 졸업장을 받고 동기생 명단을 육사 교훈탑아래 졸업생 명단에 부착하게 됨으로서 우리 생도 2기들은 명예 회복과 동시에 육사 총동창회 정회원이 되는 기쁨을 얻었다. 정규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6.25에 참전하였음을 기리는 조형물인 참전생도상까지 건립하여 먼저 장열하게 산화한 전우와 선배 영령 앞에 바치는 행사까지 마치고 보니 전사 동기생에 대한 살아있는 동기생으로서의 책무의 일부를 달성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이제 살아있는 생도 2기 동기생들이 무었을 해야 할 것인가? 남은 여생을 육군사관학교 발전과 총동창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총동창회 주최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3군사관학교 대항 체육대회 때는 선수 생도 격려금을 전달하고, 동기생 2/3 이상이 육사 발전기금 모금에 참여하고 있으며, 총동창회 회비납부는 대상인원 96명중 84명이 참여함으로서 해외거주 동기를 감안 하면 거의 전원이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연고로 총동창회에서 매년 선발하는 우수 동기회로 선발되어 연2회에 걸쳐 총동창회장으로부터 상장과 함께 부상의 기념품을 받은 바도 있다.

13. 맺는 말

명예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던 동기생들은 이제 떳떳이 후손에게 육사인이며 화랑대 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950년 6월1일 푸른 꿈을 가슴에 안고 생도2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던 19세의 동안의 얼굴을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조용히 앉아 흘러 간 세월과 옛날을 회상하니 마음은 옛날과 같은데 현실은 80고개 를 넘은 노병의 신세..... 그 노병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육사가 개교한지도 금년으로 65주년을 맞는다. 그 동안 수많은 영욕 속에서도 육사는 국난극복의 주체로서 명예를 떨치며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그 공과가 육군사관학교 역사에 명징하게 나타날 것이다. 육사는 대한민국의 존망을 좌우할 간성을 양성하는 곳이므로 모든 노력이 조국수호와 번영에 지향되어야 할 것이며, 다시는 과실로 육사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 육사 생도 2기생은 군의 고아가 아니며 당당한 육사인이고 화랑대 인이다. 거듭 다짐 하거니와, 19세 홍안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생도모집에 또 응시할 것이다. 이는 어느 한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생도2기생 전원의 생각일 것임을 확신하면서......

2009년 11월30일



육사 생도2기 동기회장 장기호와 동기생 일동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