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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광장

자랑스런 육사인상-2011정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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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구 정래혁
주요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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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래 혁 동문은 1941년 2월 1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합격 통지를 받은 후부터 그의 군 생활이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음. 광주 서 중학교에 재학 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정 래 혁 동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성적으로 모교인 서중학교는 물론이고 모든 광주 지역의 한국인 학생들, 일본인 학생 들 간에도 훌륭한 조선인으로 추앙을 받기도 하였음. 당시에 5년제인 학교에서 4년을 수료하고 월반하여 수재들만이 합격할 수 있다는 육군사관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집안은 물론이고 전남 곡성읍민들 그리고 광주 지역의 유지들도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데에 대하여 모두 기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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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4년제 육사생도로 입교하여 심신을 단련하였으며 타고난 학업의 우월성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출중하였으며 특히 과목 중 영어에서는 일본 교관보다 더 우수한 면을 보였던 바, 미군 스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함. 일본 육사 졸업식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부상으로 천황이 수여하는 회중시계를 받기도 하였음.

- 1945년에 임관했기에 당시 일본은 본토 방위에 급급했었고, 초임지가 전북 전주였으며 연대 작전과에서 근무 중 해방을 맞아 낙향을 하게 됨. 1945년 12월 5일 개교한 군사영어학교에 40번째로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나 1946년 4월 30일부로 학교가 폐지되자 다시 낙향하였음. 낙향한 고향에서 해방 후의 혼탁한 질서를 바로잡는데 일조를 하고자 경찰에 입문하여 목포경찰서 경비주임(경위)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만연 했던 밀수 단속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음.

- 경찰생활은 민생과 관련이 깊었으나 본인의 욕구와 이상이 맞지 않았던 관계로 고민하던 중에 사관학교에서 과거 군 경력을 가진 자를 모집하는 특별기가 신설됨에 따라 이에 지원, 육사 7특기로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1946년 10월 12일 임관함.

- 당시 박정희 대위가 8기생 중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임관 후 구대장으로 함께 근무하면서 8기생의 훈육을 맡기도 했음. 그 후 상당히 빠른 진급을 거쳐 한국전쟁 직전에는 중령으로 작전분야에서 근무하게 되었음.

-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후퇴를 거듭하면서 낙동강까지 밀려서 방어선을 지탱하다가 3사단 참모장으로 발령을 받아 북진 반격에 일조를 하였으며 역사에 빛나는 백골부대의 창설도 이 때에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음.

- 휴전 직후 미 보병학교 선발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도미 교육을 받았으며,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 장교의 명예를 빛낸바 있음. 귀국 후에는 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육군본부 일반참모 비서실장 직을 수행하면서 우리 육군의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음.

- 1954년 상무대 육군 보병학교 교장서리로 근무를 하게 되었으며 당시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몸으로 느끼고 모자랐던 전술적인 부분을 교리에 포함시키는 등,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음.

- 영예로운 장군 진급을 하여 한국전쟁시 참모장을 지냈던 3사단 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아 최선을 다해 근무하던 중, 설화(雪禍)사건이 발생하여 국내 모든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효과적이고 집중적인 조치로 피해를 최소화함으로써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사단의 정예화에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여 타 사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음.

- 3사단장을 마치고 이어서 한국군의 독립 작전능력을 극대화 하겠다는 우리의 집념과 미군의 협조에 의하여 미군 편제와 유사한 현대화된 시제 보병사단의 운영을 당시 27사단이 맡았는데 여기에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사단편제 및 운용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음.

- 전방근무를 마치고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과 군수국 차장 그리고 국방부 총무국장을 역임하면서 본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하는 모든 상 하급자들간의 소통을 중요시하여 이를 근무상의 최대 이슈로 내걸고 노력한 결과, 참모 수행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음.

- 5.16 군사혁명 당시 국방대학원 학생으로 학문에 골몰하던 정 래 혁 소장은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의 일원으로 혁명내각에 입각하여 상공부장관에 임명이 되었으며 당시 무질서하고 무능했던 국영기업의 운영을 재정비하여 정상적으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이에 더하여 국영기업들의 재창출을 위해서는 외국의 자본을 유치해야만 국가의 효율성을 높일수 있다는 사명감으로 대상을 물색하던 중, 이를 현실화 시키는 방법으로 서독의 후진국 원조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음.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 정 희 장군의 지시에 의거 영국을 거쳐 서독으로 건너가서 우리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서독정부가 후진국에 원조 했었던 1억 5천만 마르크를 장기 개발차관 협정에 따라 프랑크푸르트 시에 소재한 국영 독일 재건은행 (Frankfurt/Main, Kreditanstalt fur Wiederaufbau)을 통해서 제공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에 외국에서 빌린 최대의 액수였음. 1961년 12월 13일에 한, 독간에 체결된 1억 5천 마르크 개발차관은 대한민국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 간의 경제 및 기술협정(정래혁 상공부장관과 배스트릭 경제차관 서명)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었음. 이 자금은 당시의 산업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후세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국발전의 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 졸업생들의 각종 행사시 강재구 동상에 헌화를 함으로써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으며, 매년 전후방 각지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전투중대장 14명을 선발하여 재구상을 수여하고 있음.
- 원래 과묵한 성격의 정 장관은 상공부 부하 직원들로부터 특별한 지지를 처음에는 얻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타입이고 부하 직원들에게도 친밀하고 정답게 대하는 최고의 장관이란 평을 듣기도 했으며 "곰탕 장관"이란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중식을 부하 직원들과 식당에서 해야 하는데 밀리는 보고와 결제를 하는 시간 등이 부족하여 장관실에서 빨리 식사를 끝내고 못 다한 잔무를 처리하였기 때문에 생긴 별명이었음.

- 군사혁명의 근무를 종료하고 군에 복귀한 정 래 혁 중장은 먼저 1군 부사령관을 지냈으며 1963년에 6군단장, 1965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음.

- 육사 교장 재임시에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의하여 태능 컨트리 클럽을 설치(1966.11.5), 예비역/현역 장교들의 건강 지킴이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을 비롯하여 다음과 같은 업적을 남겼음.
- 서독육사에 매년 사관생도 2명씩을 유학시키는 계획을 실현시키고, 사관학교 설치법 시행령을 개정(1966.12.1) 법적 근거도 마련.
- 1966년부터 일반대학 대학원 재학생을 육사교수요원으로 선발하여 석사학위 취득과 함께 소정의 군사교육 후에 중위로 임관시키고 교수로 임용하여 3년간 육사에서 복무케 하는 특수간부후보생 제도를 도입, 생도교육에 새로운 기풍 진작.
- 1966년부터 전임강사 이상의 교수에게 연구수당을 지급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우수교수요원 확보에 기여.
- 65.9.4 수도사단 1연대 10중대장 故 강재구 소령이 파월 훈련 중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부하를 구하고 산화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故 강재구 소령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아 동상 건립, 교재 및 전기 편찬, 군가 제정, 재구상 제정, 영화 제작등 기념사업을 심혈을 기울여 추진.
- 이 밖에도 최초의 학교소개영화 제작을 비롯하여, 국제규격의 야외 수영장 준공(64.9.11), 화랑연병장 사열대 완공(66.9.24), 관창 체육관 건립(66.9.24), 군마장 개장(1966.11.5) 등 각종 시설과 교육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바 있음.

- 1966년 말에 2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정 중장은 야전은 아니지만 자신의 소신대로 2군의 역할을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활동으로 정하고 매진한 결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었음. 또한 재임 중에 파월 한국군을 방문하여 사기를 드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협조사항에 동참함으로서 해외 파병의 타당성 및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기도 하였음.

- 2군사령관을 군 생활의 말미로 장식한 정래혁 중장은 1968년 2월에 전역을 하였으며 그의 과묵하고도 충실한 복무태도와 진중하고도 정확한 상황파악과 조치 능력 등은 많은 후배 장교들에게 귀감이 되었음.

- 전역 후 1968년 2월 21일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으로 다시 임무를 받은 후 실로 많은 업무를 쉴 새 없이 처리하였던 바, 5.16 군사혁명 후 1년 5 개월 동안 재직했던 상공장관 때 전원개발 5개년 계획을 직접 편성했으며 군정이 단행한 여러 혁신적인 사업 가운데 하나인 전기 3사 통합의 단안을 내리고 이를 단행했었던 장본인인 정 사장은 전국의 수력 및 화력발전소의 발전 용량을 늘리는 사업을 광범위하게 벌여서 산업발전에 필수적인 전력을 원활하게 공급하였음.

- 또한 1968년 당시 배전선로의 고장처리는 물론, 선로보수 잡공사 등의 공사업무를 처리하는 전기원이 한국전력 전체종업원(약 1만 2,000명)의 33%(4,000여명)를 점하고 있었고, 업무의 중요도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정래혁 사장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10월 31일을 '전공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행사 통해 노고를 널리 표창하여 그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배전의 노력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았음.

- 현재 우리나라의 원자력발전소 수가 20개이고 세계 6위의 원전 운용국가가 되어있지만, 정 사장이 부임했던 1968년도에는 기초 단계에 있었으며 이에 1968년 6월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 대해 미국의 General Electric, Combustion Engineering, Westinghouse, 영국의 The British Nuclear Export Executive로부터 예비견적서가 제출되었으며 사전에 정 사장은 미국, 영국, 카나다 등지의 원전을 돌아보고, 1969년 1월, 이 가운데 웨스팅하우스의 가압경수형로를 쓰기로 결정을 하여 1971년 3월 경상남도 양산군 장안면 고리에서 기공식을 가졌고, 1978년 7월 20일 고리 1호 원자력발전소가 준공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음.

- 1970년에서 1971년 사이에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가 대두되고, SCM의 중요성을 어느 때보다 절감할 때였음. 이에 따라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과의 유대에 적격인 정래혁 장관이 발탁되었던 것이고 실제 하와이에서 실시된 SCM에서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도 미명에 부치게 하고 자주국방의 초석이 될 수 있는 M-16공장의 한국유치, S-2 해상초계기의 획득 등 실로 획기적인 성과를 얻었음.

- 1970년 3월 31일,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 행 일본항공 351편이 일본 적군파 소속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는데, 김포를 평양이라고 속이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승객들의 안전이 위협 당했을 때, 직접 협상을 전개 했던 정 래 혁 장관은 적군파들의 의견을 설득하여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 정무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승객인질 대신으로 북한으로 가는 것을 성사시킴으로서 위급했던 상황을 어느 정도 안전하게 처리하였으며 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음.

- 1971년 8월 23일 일어났던 실미도 사건은 북파부대원들이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사건인데, 이는 당시 우리의 형편이 이들을 제대로 운용을 못해서 일어났음으로 이에 책임을 지고 국방장관을 사임하게 되었음.

- 이 이후 정 래 혁 예비역 중장은 1973년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 공화당 소속으로 서울 성북구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며 1978년에는 본인의 고향인 곡성. 화순 지역에 입후보하여 다시 당선이 되어 국회에 진출,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활약을 하게 됨으로서 다시 군에 대한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음.

- 제 5 공화국에 들어와 정 래 혁 의원은 1981년 4월 11일 국회 의장에 피선되어 제 11대 1기 국회의장으로 재임 기간 중에는 현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국회를 옮겨와 새로운 기풍과 각오로 민정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공명정대한 민주사회 구현에 앞장을 서는 국회로서의 본질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였음.

- 결론 정 래 혁 동문은 비록 일제 치하에서 군대 생활을 시작했으나 해방을 맞으면서 우리 군의 창설에도 뜻을 같이 했으며 애국, 애족의 정신으로 정의롭게 살아 오면서 육사의 명예를 지키고 지 인 용의 교훈을 빛내 온 자랑스런 육사인임. 조국의 어려운 여건아래서도 남다른 인품과 능력을 갖추어 온 정 래 혁동문은 야전 지휘관과 작전, 전략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로서 국가안보와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해 왔을 뿐만 아니라, 정계에 진출해서도 군을 대변하고 군을 위한 여러 가지 조치 등을 선도했으며 육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늘 도왔으며 생활 중에 육사 후배들을 위해서도 많은 좋은 일들을 하였음.

◆ 이력
 
  성명 정래혁(丁來赫)
  군번 11547
  기수
특7기
  전역일 68년 12월
  주민등록번호 260117 - 1******
  생년월일 26년 1월 17일생
  주소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프라자아파트 601호
  전화 02-402-1496

  # 학력
  1937-1940 광주서중 4년 수료
  1941-1945 일본육사 졸업 (제58기)
육사 졸업(제7특기)

  # 경력
   제3사단장
   제27사단장
   육군 작전국장
   국방부 총무국장
  1961-1962 상공부 장관
  1963 제6군단장
  1965 육군사관학교 교장
  1966-1968 제 2군사령관
  1968. 2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
  1973 성북구 국회의원
  1978 곡성,화순 국회의원
  1981 제11대 국회의장

  # 포상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 가족사항
  처 주 숙
  자 정채하
  자 정준하
  자 정영하
  자 정진하
  자 정희주